창업자가 하면 안 되는 것들
우연히 인스타그램에서 실패 모으기라는 채널을 발견했습니다. 한때 잘나가던 스타트업 대표들의 흥망성쇠를 투명하게 공유하는 곳이었습니다. 보면서 존경스러웠습니다. 자기 실패를 솔직하게 꺼내는 일에는 성공을 말하는 것보다 훨씬 큰 용기와 자존감이 필요하니까요. 그래서 거창하지 않더라도 이런 주제를 솔직하게 나눌 수 있는 커뮤니티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지난 밋업에서 연사로 함께해 주셨던 한국계 캐나다인 Brian Jin 님이 먼저 연락을 주셨습니다. 본인의 창업 실패 경험을 바탕으로 초기 창업자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원래는 온라인 웨비나로 하려고 하셨는데, 그러기엔 아까운 이야기라 저희가 공간과 홍보를 맡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금요일 아침 열 시에 디캠프 선릉에서 자리가 열렸습니다.


해야 할 것 말고, 하지 말아야 할 것
Brian 님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엔지니어이자 창업가입니다. 지난 밋업 파이어사이드 챗에서는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을 밟다가 투자 직전에 시장 판단이 통째로 뒤집히면서 같은 기수 열여덟 팀이 한꺼번에 멈춘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이날은 그 경험을 정리해서 오셨습니다. 덱 제목이 이랬습니다.
What Founders Should Avoid. Five mistakes that get expensive fast.
빠르게 비싸지는 다섯 가지 실수. 문제를 어떻게 찾고, 검증하고, 만들고, 투자를 받는지에 대해 해야 할 것은 인터넷에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공유하고 싶어서 이 자리를 만들었다고 세션을 여셨습니다.
첫 번째, 엉뚱한 게임을 하지 마세요
Bad advice is often good advice applied to the wrong company.
나쁜 조언은 대개, 엉뚱한 회사에 적용된 좋은 조언이라는 첫 슬라이드의 문장이 이날 전체를 관통했습니다. B2B와 B2C가 다르고, VC를 받는 것과 부트스트랩이 다릅니다. 이 두 축을 교차하면 네 개의 칸이 나오는데, 칸마다 좋은 것의 정의가 다릅니다. B2B를 부트스트랩으로 하면 매출이 먼저고 ICP를 좁게 잡아야 합니다. B2B로 VC를 받으면 큰 시장과 반복 가능한 시장 진입 방식이 기준이 됩니다. B2C 부트스트랩은 수익화와 리텐션, B2C에 VC가 붙으면 유통과 인게이지먼트와 스케일이 기준이 됩니다.
자금 조달 방식이 좋은 것의 정의를 바꿉니다. 부트스트랩으로 가면 개인 활주로가 없으니 무조건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런데 버티다 보면 VC의 유혹이 오고, VC에 가면 질문 자체가 달라집니다. 내가 돈을 줬을 때 열 배, 오십 배, 백 배를 돌려받으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 그래서 한 달에 만 달러씩 구독료가 꼬박꼬박 들어오는 회사는 부트스트랩 입장에서는 훌륭한 회사인데, VC 입장에서는 아예 분석할 수 없는 회사가 됩니다.
Is it backable?
Antler에 있을 때 파트너들이 항상 던졌던 질문이 이것이었다고 합니다. 이게 투자할 만한 것이냐. 그런데 이 대목이 솔직해서 좋았습니다. 그 backable이라는 답을 저희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는 것. 숫자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겁니다. 본인이 내린 결론은 스피드였습니다. 내가 얼마나 빨리 시장을 점령하느냐. 딥테크도, 피지컬 AI도, 로봇도, 디펜스도, 스페이스도 아니면 기본적으로 SaaS인데, 이런 회사가 너무 많아서 시장 규모가 아무리 커도 완전한 레드오션이라는 것입니다.
파운더 마켓 핏이 먼저다
프리시드는 파운더에게 투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는 PMF도 필요 없다고 합니다. 그건 나중에 알아서 찾으라는 게 그들의 입장이라는 것. 흥미로운 건 그다음이었습니다. VC를 안 받고 부트스트랩으로 가도 파운더 마켓 핏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스타트업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버티려면 집요하고 꾸준하고 회복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려면 본인이 직접 겪은 문제이거나 개인적인 미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B2C는 미션만으로도 가능하지만 B2B는 무조건 본인이 겪어본 문제여야 하고, 그 산업의 도메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의료 쪽에서 창업을 준비하시는 참석자 한 분이 재밌는 반론을 하셨습니다. 본인 도메인에서 플레이하다 보니 오히려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 오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이걸 하고 있다는 걸 주변이 다 아는데,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면 손가락질을 받는 상황이 되어버린다는 것. 도메인 지식은 무기인데 동시에 양날의 검이었습니다.
제품을 말하지 않고 설명할 수 있습니까
Can you explain the game without mentioning the product?
VC들이 항상 요구했던 것입니다. 나를 열 살짜리라고 생각하고, 한 줄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만족스럽게 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ICP나 린 캔버스 같은 도구에 대한 관점도 좋았습니다. 처음에는 근거도 없이 내 판단만으로 만들어야 하니 왜 이걸 만들어야 하나 싶어서 한 번 만들고 때려쳤는데, 나중에 다시 보니 이건 결과물이 아니라 프로세스였다는 것입니다. 인터뷰 열 명을 하고 와서 갱신하고, 또 하고 또 갱신하는 것. 그러다 보면 시리즈 B, C까지 계속 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메모를 보면서 머릿속에서 회상하며 만들었는데, 요즘은 AI 회의록으로 한다. 그런데 오히려 예전 방식이 더 좋았던 것 같다는 것. 그 과정에서 얻는 인사이트를 AI가 주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고객이 원한다고 말한 것을 만들지 마세요
Avoid building what customers say they want.
고객의 말은 가설이고, 행동이 증거입니다. 슬라이드에 두 칸이 나란히 있었습니다. 고객이 말하는 것. 이거 자동화해줄 수 있어요? 이 기능 추가해주세요. 저는 이거 무조건 쓸 것 같아요. 고객이 실제로 하는 것. 엑셀로 우회하기. 슬랙이나 이메일로 승인받기. 복사해서 붙여넣고 누군가에게 물어보기. 그래서 순서는 인터뷰, 잡 섀도잉, 프로토타입, 파일럿입니다. 디자인 파트너에 대한 경고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도와주고 싶어 하기 때문에 실수로 내 가설을 과잉 검증해주거나, 자기들만을 위한 맞춤 기능 쪽으로 나를 끌고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Replace "Would you use this?" with "Show me how you do this today."
이걸 쓰시겠어요를, 지금 어떻게 하고 계신지 보여주세요로 바꾸라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우리 경쟁자는 엑셀이 아니라 챗지피티였다
잡 섀도잉이 뭐냐는 질문에서 이날 가장 좋은 사례가 나왔습니다. 쉽게 말하면 그 회사에 취직해서 선배가 어떻게 일하는지 옆에서 보는 것과 같습니다. 본인 사례로, 디자인 파트너가 고객사와 미팅하는 자리에 따라 들어가 회의 내용을 어떻게 정리하는지를 봤다고 합니다. 우리는 항상 엑셀과 경쟁한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경쟁 상대는 챗지피티였다는 것. 그분이 엑셀을 챗지피티에 집어넣고 이전 파일을 함께 올리면서 같은 형식으로 만들어달라고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터뷰만 했으면 절대 몰랐을 사실입니다. 인터뷰에서는 다들 엑셀 이야기를 하니까요.
자연스럽게 이어진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내가 하는 사업이 언어모델과 얼마나 가까이 있느냐에 따라 얼마나 빨리 사양 산업이 될지가 갈린다는 것. 의료 쪽 참석자분도 같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요즘은 의사들 사이에서도 바이브 코딩이 활발해서, 솔루션을 사는 대신 자기가 툴을 만들어 써버리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세 번째, 충분히 알기 전에 너무 많이 만들지 마세요
흐름이 명료했습니다. 가정, 가장 작은 테스트, 행동, 증거. 무엇이 참이어야 하는가, 지금 당장 테스트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사용자가 실제로 무엇을 했는가, 무엇이 바뀌었는가. 신호도 약한 것과 강한 것으로 나눠주셨습니다. B2B의 약한 신호는 미팅, 의향서, 무료 파일럿, 덱에 박힌 로고. 강한 신호는 예산, 반복 사용, 워크플로 변화, 확장. B2C의 약한 신호는 다운로드, 출시 직후의 스파이크, 좋아요. 강한 신호는 리텐션, 추천, 반복 행동, 지불 의사입니다.
Every build should retire a risk.
더 만들지 말고 더 배우라는 것. 창업자는 불확실할 때 더 만드는 것으로 반응합니다. 통합 하나 더, 인프라 조금 더, 기능 하나 더, 아니면 아예 플랫폼. 그럴 게 아니라 가장 위험한 가정이 무엇이고 그것을 틀렸다고 증명할 가장 싼 테스트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랜딩 페이지도 만들지 마세요
여기서 나온 조언이 가장 셌습니다. VC에게 직접 들었던 말이라고 합니다. 이걸 개발하지 마. 랜딩 페이지도 만들지 마. 무조건 고객을 만나. 너는 어차피 나중에 필요하게 돼 있어. 본인이 개발자라서 개발하는 게 편했다고 하셨습니다. 눈에 보이고 성취감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걸 한다고 비즈니스가 되는 게 아니라는 것. 스타트업은 비즈니스를 만드는 것이지 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링크드인 이야기도 재밌었습니다. 스텔스 모드 프로필이 6개월을 넘어가면 VC가 안 본다고 합니다. 그러니 링크드인 페이지도 만들지 말고, 지금은 고객과 이야기하는 게 아침 아홉 시부터 밤 아홉 시까지여야 한다는 것. 엔터프라이즈에 팔지 말라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사이클이 너무 길어서 1년씩 기다리는 경우가 있고, 본인도 디자인 파트너까지 갔는데 도저히 계약이 닫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승인 절차가 필요 없는 미드마켓,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고객 위주로 가라는 조언이었습니다. 결국 피벗할 텐데 한 달씩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요.
제일 좋은 시그널
어느 수준까지 검증하고 제품을 내야 하느냐는 질문에 답이 명쾌했습니다. 교과서적인 정답이 하나 있는데, 제품이 없는데 사람이 돈을 주는 것. 야 나 돈 줄 테니까 만들어줘. 물론 한 명이 그런다고 되는 건 아니지만 그게 교과서적인 정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인터뷰인데, 질문을 잘 만들어야 한다며 The Mom Test를 추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구분이 중요했습니다. 인터뷰는 가설을 더 가설답게 만들 뿐, 수요가 아니고 트랙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해자가 없으면 남는 건 유통뿐입니다
Antler 파트너들이 Brian 님의 사업에 대해 지적한 건 두 가지였다고 합니다. 하나는 클로드가 내일 버전을 올리면 살아남을 수 있느냐. 다른 하나는 클로드가 코딩을 워낙 잘하게 돼서 같은 걸 하는 회사가 갑자기 백 개가 됐다는 것. 더 무거웠던 건 두 번째였습니다. 첫 번째는 나만의 문제지만 두 번째는 시장 전체의 문제라서, 아무리 잘해도 그 안에서 승자가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Distribution turns product into a company.
기술로 해자를 만들 수 없다면 남는 건 무조건 디스트리뷰션입니다. 유통이 제품을 회사로 만듭니다. 이날 유통에 대해 나온 사례 중 하나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한국에서 시작해 지금은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계신 어떤 대표님이, 코엑스의 큰 행사에서 인형탈을 쓰고 외국인들에게 가방을 나눠주셨다고 합니다. 탈을 썼으니 얼굴도 안 보이고 부담도 없어서 자연스럽게 말을 붙일 수 있었고, 그렇게 관심을 보인 한 분과의 인연으로 지금 미국에 가 계신다는 것. Brian 님의 코멘트가 좋았습니다. 아이디어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 정도까지 하는 사람이라서 열린 문이라고.
네 번째, 펀드레이징을 대출처럼 다루지 마세요
Choose investors like partners, not ATMs.
투자자를 ATM이 아니라 파트너로 고르라는 것. 7년에서 10년을 함께할 수도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게임을 하지 말라는 문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현장에서 들려주신 경험담은 훨씬 날것이었습니다. Antler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 3개월 동안 거의 2주에 한 번씩 파트너 인터뷰와 진행 상황 업데이트를 했는데, 그 사람들은 본인이 참여하기 전까지 무엇을 만드는지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숫자였습니다. 디자인 파트너 몇 명 있느냐. 의향서 받았느냐. 정말 철저하구나, 라는 말이 남았습니다.
챔피언을 찾으세요
You pitch the investor, then that investor has to pitch you internally.
펀드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설명이 이날 가장 실용적이었습니다. 투자심의위원회 몇 명 중 한 명이 우리를 지지해주면, 그 사람이 내부에서 우리 대신 방어를 해줍니다. 그게 챔피언입니다. 재밌었던 건 Brian 님을 챔피언해준 사람이 위원회에서 가장 직급이 낮은 분이었다는 것. 직급보다 실제 영향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챔피언이 만드는 인베스트먼트 메모가 모든 파트너의 결정 근거가 되는데, 더 중요한 건 그 메모가 다른 VC들에게도 공유된다는 점입니다. 프리시드에 투자한 VC는 이미 다음 시드 라운드를 준비해야 하니까, 자기 네트워크의 시드 투자자들에게 메모를 미리 보낸다는 것. 그래서 메모에 어떤 항목이 들어가는지를 알아야 VC에게 어떤 정보를 어떻게 전달할지 알 수 있습니다.
25만 달러를 어디에 쓰나
언제 투자를 받아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병목이 생겼을 때라고 답하셨습니다. 다만 프리시드는 다릅니다. Antler 캐나다는 25만 달러에 지분 9퍼센트를 가져가는데, 그 돈을 어떻게 쓸지 계획을 만들 때 원칙이 두 가지였다고 합니다. 파운더 급여가 있으면 안 된다. 채용을 하면 안 된다. 그럼 어디에 쓰느냐. 세일즈와 마케팅에 다 쏟는 것입니다. 본인들은 파트너사들이 모이는 북미 컨퍼런스를 다니는 비용으로 계획을 잡았다고 합니다.
Antler에서 투자를 받은 어느 팀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세 명인데 지금도 제품이 없고, 그런데 고객은 있고 돈도 받았다는 것. CTO가 없는 팀인데 프로덕트 담당이 AI로 개발을 다 합니다. 예전에는 파운딩 팀에서 기술의 비중이 50 대 50이었다면 지금은 80 대 20이나 100 대 0이 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투자자도 레퍼런스 체크하세요
Reference-check investors, especially founders who struggled.
투자자를 역으로 레퍼런스 체크하되, 특히 어려움을 겪은 창업자들에게 물어보라는 것이 덱의 문장이었는데, 현장에서는 훨씬 직설적이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나 뉴욕에서 만나는 사람 열에 아홉은 일단 경계하고 시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패턴 두 개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드바이저를 해주겠다며 지분 5퍼센트를 요구하는 사람, 소개해줄 테니 커미션을 달라는 중개자. VC를 많이 만나는 건 좋지만, 초기 단계에서 거기에 매달릴 정도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버티컬은 끝났고, 청바지를 팔아야 합니다
VC들이 무엇에 투자하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에는 Request for Startups를 소개하셨습니다. VC가 투자하고 싶은 분야를 공개하는 목록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단서를 다셨습니다. 그걸 보고 준비하면 이미 늦다는 것. 그러니 흐름을 예측해야 합니다. 이 말이 이날 가장 오래 남았습니다. AI가 뜰 건데, 광맥이 터질 건데, 그러면 청바지를 팔아야 하는데, 그 청바지가 뭐냐. 골드러시에서 금을 캐러 간 사람이 아니라 청바지를 판 사람이 돈을 벌었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본인의 답은 인프라였습니다. 도메인 하나를 깊게 파는 버티컬은 가망이 없다고 보셨습니다. 예로 든 게 LangChain입니다. 오픈소스로 프레임워크를 뿌리고, 그걸 관측하고 관리하는 LangSmith로 돈을 법니다. 그리고 이건 도메인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로봇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지금 로봇의 가장 큰 병목은 학습 데이터가 없다는 것인데, 그럼 그 데이터를 모으는 것 자체가 인프라 플레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수술 로봇을 준비하시는 참석자와의 대화가 좋았습니다. 의사분들의 모션 데이터를 얻는 것 자체가 중간 제품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Brian 님의 질문에, 그분의 답이 현실적이었습니다. 공장 근로자는 돈을 주면 장갑을 끼고 카메라를 달아줍니다. 그런데 수술은 환자에게 의학적인 이득이 있어야 그 행위가 정당화되기 때문에, 데이터를 모으는 것 자체에 레이어가 하나 더 있다는 것. 같은 인프라 논리인데 산업마다 넘어야 할 문턱이 다르다는 걸 보여주는 대화였습니다.
YC에 열 번 떨어지고 나서
Brian 님은 YC에 열 번 지원해서 열 번 다 떨어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Antler를 끝내고 나서는 처음으로 지원서를 안 쓰고 링크드인으로 메시지를 보냈더니 답장이 왔다는 것. 아직 좀 이른 것 같다는 답이었지만, 어쨌든 열 번의 지원서보다 한 통의 메시지가 반응을 얻은 셈입니다. YC는 아이디어에 투자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YC는 무조건 출시를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판단을 외주 주지 마세요
Everyone gives you a signal. Nobody else owns the decision.
마지막 실수가 이 세션의 결론이었습니다. 모두가 신호를 주지만, 결정을 소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슬라이드에 다섯 줄이 있었습니다. 고객은 고통은 알지만 해법은 모른다. 디자인 파트너는 깊이를 주지만 커스터마이징의 토끼굴로 끌고 갈 수 있다. 투자자는 패턴을 보지만 그 패턴 매칭이 불완전하다. 어드바이저는 진짜 경험을 가져오지만 그건 다른 회사와 다른 시대의 경험이다. 지표는 증거를 주지만, 내가 측정하기로 선택한 것에 대해서만 그렇다.
그래서 순서는 Listen, Observe, Test, Decide. 그리고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 하나. 어떤 증거가 있으면 내 생각을 바꿀 것인가.
파운더 오퍼레이팅 시스템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마지막 슬라이드가 구체적이었습니다. 가설 로그를 써라. 내가 무엇을 믿고 왜 믿는지 적는 것. 증거를 분리해서 검토해라. 고객 증거, 제품 지표, 재무 지표, 투자자 피드백을 섞지 말 것. 결정 메모를 남겨라. 결정과 트레이드오프와 담당자와 예상 결과를 기록할 것. 사후 검토 루프를 돌려라. 실제로 일어난 일과 예상을 비교할 것. 그리고 세 가지 질문을 반복합니다. 나는 무엇을 믿는가. 무엇이 내가 틀렸음을 증명할까. 그것을 배우는 가장 싼 방법은 무엇인가.
The founder's job is to get less wrong, faster.
창업자의 일은 더 빨리 덜 틀리게 되는 것이라는 문장으로 덱이 닫혔습니다. Brian 님이 덧붙이셨습니다. 이걸 제일 잘하는 사람들이 세일즈 하는 분들이고, 본인처럼 기술 쪽에 강한 사람들은 정말 어려워한다고. 무엇이 신호이고 무엇이 소음인지 구분하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고, 시간이 지나면 예전에 소음이라고 판단했던 게 신호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렇게 계속 돌리다 보면 결론은 세 가지 중 하나입니다. 계속 만들거나, 멈추거나, 바꾸거나. 바꾸기로 하면 맨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게 반복이라는 것입니다.
라운드테이블: 각자의 실패를 꺼내는 시간
세미나가 끝나고 한 시간 동안 각자의 실패 경험을 나눴습니다. 의료 쪽에서 창업을 준비하시는 분의 이야기가 무거웠습니다. 창업하기 전에 이미 안에서 몇 해 동안 제품을 만들어 보셨고, 그 시간을 지나오면서 스타트업과 의료가 과연 공존할 수 있는가를 오래 고민하셨다고 합니다. 투자를 받는 순간 주도권이 투자자 쪽으로 넘어간다고 느끼는 지점이 온다는 것, 그래서 지금은 엔젤 투자도 받지 않는다는 것. 나중에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지 못하는 상황이 올 것 같아서라는 이유였습니다. Brian 님도 공감하셨습니다. 본인이 Antler에 참여한 이유도 투자가 아니라 코파운더를 찾기 위해서였다고.
정부 지원금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그랜트에 한번 맞기 시작하면 회사의 DNA 자체가 그쪽으로 간다는 것. 비즈니스는 결국 매출을 내는 것인데, 그걸 안 보고 그랜트를 따라가다 보면 보고서를 쓰고 요구사항을 맞추는 쪽으로 회사의 체질이 바뀌어버립니다. Brian 님은 캐나다 사례를 비교해주셨습니다. 캐나다에도 그랜트가 많은데, 연구개발 인건비의 일부를 나중에 돌려주는 세액공제 방식이라 선지급이 없고, 액수가 클수록 외부 투자와 매칭을 요구한다고 합니다. 민간이 먼저 검증하면 정부가 따라붙는 구조입니다.
왜 다들 미국에 가고 싶어 하세요
Brian 님이 역으로 던진 질문이 이날의 마지막 화제였습니다. 한국에 와서 정말 궁금했다고 하셨습니다. 왜 다들 미국에서 창업하고 싶어 하시느냐고. 한 분은 인재와 자본이 거기 몰려 있어서라고 답하셨습니다. 같은 아이템을 하는 회사인데 라운드 규모가 자릿수로 차이 나는 걸 직접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투자자들은 자꾸 미국에 가라고 합니다. 의료 쪽 분의 답은 더 무거웠습니다. 안에서 직접 겪어보고 내린 결론이라, 창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미국이라는 답이 나와 있었다고 했습니다.
Brian 님은 캐나다에서는 정반대 인상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한국으로 오라는 이벤트가 많았고 지원 혜택 안내도 많이 봤는데, 실제로 여기서 운영해 보니 장벽이 많더라는 것. 다만 하나는 냉정하게 짚으셨습니다. 한국에서 쭉 살아온 사람이 미국에서 아예 시작하거나 진출해서 성공한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이민자나 유학생은 다르지만.
코파운더가 깨져서 무너집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시리즈 C부터 투자하는 VC 친구에게 요즘 그 단계에서 제일 큰 문제가 뭐냐고 물었더니, 답이 코파운더 다이나믹스였다고 합니다. 파운딩 팀 사이가 나빠져서 깨지는 경우가 엄청 많다는 것. 그 단계에서는 어느 정도 매출도 나오는데 그것 때문에 실패하는 회사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코파운더를 찾을 때 가장 좋은 건 친구나 동료, 과거에 오르내림을 함께 겪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Antler에서는 코파운더 정렬을 위한 질문 50개짜리 템플릿을 준다고 합니다. Brian 님은 그걸 하루에 다 하셨는데, 각자 답을 미리 써놓고 내 컴퓨터로 상대가 보고 상대 컴퓨터로 내가 보면서 질문을 하나씩 읽어가며 대화를 나눴다는 것. 답을 읽고 이해하는 것보다, 답을 대신 읽어주면서 서로 맞춰가는 그 과정이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만 남기자면
나쁜 조언은 대개, 엉뚱한 회사에 적용된 좋은 조언입니다.
이날 나온 것 중 하나만 가져간다면 저는 첫 문장을 고르겠습니다. 우리는 창업 조언을 정말 많이 듣습니다. 인터넷에도 넘치고 행사에도 넘칩니다. 저도 매주 그런 자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조언들이 서로 부딪히는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B2B와 B2C가 다르고, VC와 부트스트랩이 다르고, 그 네 칸에서 좋은 것의 정의가 각각 다릅니다. 그러니 조언을 듣기 전에 내가 어느 칸에 있는지부터 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오는 문장이 결국 같은 말이었습니다. 판단을 외주 주지 마세요. 모두가 신호를 주지만 결정을 소유하는 사람은 나뿐이니까요.
고맙습니다
공간은 디캠프 선릉에서 후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연락을 주셔서 자기 실패를 정리해 오신 Brian 님께 감사드립니다. 성공담을 나누는 자리는 많은데 실패담을 나누는 자리는 드뭅니다. 앞으로도 이런 자리를 자주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Bloom과 함께하기
Bloom은 사람과 기술이 만나는 오프라인 자리를 만듭니다. 다음 행사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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