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해자 = 도메인 경험
요 며칠 소프트웨어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두 가지 소식이 크게 돌았다. 하나는 미국의 한 개발자가 Claude Opus 5.5로 포토샵을 비롯한 어도비 앱 7종을 다시 만들어 무료로 공개했다는 소식이다. 본인도 아직 알파 버전이라고 할 만큼 거칠고 코드를 베낀 게 아니라 동작을 보고 새로 만든 것이지만, 그럴듯한 대체품을 만드는 비용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보여 주기에는 충분했다. 다른 하나는 완성된 프로그램을 거꾸로 뜯어 작동 원리를 알아내는 역공학을 AI 에이전트에게 맡기는 REA라는 오픈소스로, 숙련된 전문가가 몇 주씩 매달리던 일을 이제는 에이전트가 기존 분석 도구를 붙잡고 대신한다.
그 소식을 보면서 나는 소프트웨어가 결국 다 역공학으로 복제될 테니 답은 콘텐츠 쪽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 생각도 하루 만에 깨졌다. 금요일 오후 Bloom Mixer에서 만난 분이, 잘 나가는 채널의 영상 링크를 붙여 넣고 주제만 바꿔 달라고 하면 형식이 거의 그대로 따라 나온다고 했기 때문이다. 편집까지 맡겨 봤더니 AI가 토큰을 쓰는 대신 아예 편집 도구를 직접 만들어 쓰더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소프트웨어 다음은 콘텐츠라고 생각했는데, 콘텐츠도 이미 같은 길에 들어서 있었다.
누구나 AI로 뭐든 만들고 베낄 수 있게 된 시대에, 경쟁자가 쉽게 넘어오지 못하게 막아 주는 해자는 무엇일까. 그 주에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대답은 자꾸 같은 곳으로 돌아왔는데, 현장에서 직접 겪어 본 사람만 아는 문제와 그 사람만 가진 데이터였다.
아이디어에 해자가 없는 게 아니라, 아이디어가 없었다
스타트업을 하는 형은 그날 점심을 먹으며 팀 개발자들과 내내 이 이야기만 했다고 했다. 형의 팀도 지금 서비스 말고 다른 걸 해 보자며 각 팀원들이 새 아이템을 하나씩 가져오기로 했는데 결국 아무도 가져오지 못했고, 형은 그걸 두고 "진짜 아이디어가 없어요"라고 했다.
나도 오래 비슷하게 생각해 왔다. AI 시대에는 아이디어에 해자가 없다고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문제는 아이디어에 해자가 없는 게 아니라 아이디어 자체가 없다는 데 있다. 아이디어가 누구에게나 똑같이 있다면 가장 싸게 만드는 곳이 시장을 다 가져갔을 것이다. 그런데도 실리콘밸리가 계속 가져가는 건 아이디어와 기획, 그리고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먼저 알아채는 감이 있어서다. 우리는 늘 "아, 그런 거 만들걸" 하고 말하지만 정작 그걸 먼저 만들지는 못한다.
형의 팀 개발자들은 남이 만든 프로그램을 AI로 거꾸로 뜯어 뚝딱 다시 만드는 걸 보고 요즘 현타가 왔다고 했다. 자기들이 만드는 서비스도 그렇게 금방 다시 만들어질 것 같았다는 것이다. 형은 그날 팀과 나눈 이야기의 결론을 이렇게 전했다.
이게 뭐 AI로 소프트웨어 만드는 게 진짜 노답이야. 도메인 지식 있는 사람이 직접 만드는 게 나으니까.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파는 회사보다, 그 일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AI로 직접 만들어 쓰는 쪽이 낫다는 말이다. 형의 팀에도 AI로 시장 규모부터 계산해 보고 이 정도밖에 안 된다고 말하던 동료가 있었는데, 지금은 스스로 생각을 완전히 바꿨다고 했다. 영업이익률이 15%만 나와도 정말 좋은 회사인데, 소프트웨어는 인건비와 서버비 말고는 나가는 게 없으니 70%는 남겨야 한다고 계산하는 것부터가 이제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만들어 들고 가 보니 다른 문제가 있었다
형의 지금 아이템도 책상에서 나온 게 아니다. 형은 우연한 일로 현장 사람들을 만났다가 그들이 겪는 불편을 들었는데, 어려운 일도 아니라서 그날 집에 와서 바로 만들어 보여 줬더니 그 자리에서 돈을 내고 샀다고 한다. 그 뒤로 형은 시간이 날 때마다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는데, 10명 중 1명은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했다.
금요일 Mixer에 함께 온 형은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나 더 들려줬다. 만든 걸 들고 현장에 찾아가 써 보라고 했더니, 그건 진짜 문제가 아니니까 그거 말고 이걸 해결해 달라는 전혀 다른 요청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만드는 사람이 책상에서 짐작한 문제와 현장 사람이 매일 부딪히는 문제는 그만큼 달랐다.
그래서 형은 요즘 개발이 아니라 기획에서 막힌다. 기획과 디자인을 맡고 세일즈까지 뛰는 사이에 개발은 몇 시간 만에 끝나 버리니 기획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형은 그 업계 사람이 아니라서 그들이 겪는 불편을 직접 들어야 다음에 뭘 만들지 정할 수 있는데, 그게 늦어지는 날에는 형이 팀 전체의 병목이 된다. 그래도 마지막 손질만큼은 여전히 개발자가 하는 게 낫다고 했다. 처음에는 형이 직접 해도 괜찮아 보였지만, 개발자가 다듬은 것과는 마지막 완성도가 확실히 달랐다고 한다.
반대쪽에도 틈은 있었다. 형이 경쟁 제품을 찾아보니 한두 달 사이에 그 업계 사람들이 직접 만든 제품이 여럿 나와 있었는데, 들어가 보면 필요한 기능은 다 있는데도 AI가 만든 티가 너무 나고 쓰기가 불편했다고 한다. 문제를 정확히 아는 것과 그 문제를 푸는 제품을 잘 만드는 것 사이에는 아직 분명한 틈이 남아 있다.
치과 원장은 구독을 해지했다
그 틈을 혼자 넘어선 사람의 글이 마침 그 주에 화제가 됐다. 아카라이브에 올라온 「동네 치과의 AX전환기」라는 글이다. 생물학을 전공한 동네 치과 원장이 Claude와 Codex를 역할별 팀원처럼 부려서, 전화 응대부터 보험 서류 대조, 경영 리포트, 사내 메신저까지 병원 안에서 직접 돌리게 된 이야기다. 그러는 동안 전화 녹음, 문서 인식, 예약 문자처럼 매달 나가던 구독 서비스를 하나씩 끊었고 회계 서비스와 광고 대행도 정리했다.
이 글을 본 개발자들은 AI를 정말 잘 쓰는 분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건 AI 전문가가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치과의사라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라고 봤다. 금요일 Mixer에서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한 분이 그 원장은 무엇보다 문제를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점심 Mixer에서 만난 분의 말도 같았다. 실제로 어디서 문제가 계속 쌓이는지 아는 사람만 그걸 자동화할 수 있고, 그래서 AI 전문가와 실무자 사이에는 갭이 있다는 것이다. 그분도 매일 반복되는 일이 짜증 나서 자동화하고 싶다고 했는데, 목표는 그렇게 해서 회사 살림을 혼자서도 돌릴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만든 시스템은 따로 팔 수도 있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원장이 글에 남긴 정리도 그랬다. 비전공자도 이런 걸 만들 수 있지만, 무엇을 시킬지는 치과 일을 제일 잘 아는 원장이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원장은 AI가 사람을 대체한다기보다 사람이 싫어하던 일을 가져간다고 적었다. 직원은 AI가 확인이 필요하다고 표시해 둔 것만 보면 되고, 판단은 여전히 사람이 하며, AI에게는 읽고 정리하고 제안하는 데까지만 맡긴다.
광고비를 많이 쓰면 그걸 메우려고 환자 한 명에게서 더 받아내야 하는 구조가 되고, 그러다 보면 안 해도 될 치료를 권하게 된다는 대목도 있었다. 원장은 AI 덕분에 광고비를 끊으면서 필요 없는 치료는 안 해도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치과에 가까워졌다고 했다. 숫자를 다루는 사무 일은 앞으로 AI가 다 할 것 같다면서도 입 안에서 손으로 하는 일은 아직 AI가 못 한다고 적었고, 가장 큰 병목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라고도 했다. 나이 든 환자가 많아 여전히 종이 차트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원장은 2년 안에 아이디어만 있으면 누구나 이런 걸 만들게 될 거라며, 만든 것의 대부분을 다른 치과의사들에게 오픈소스로 풀 생각이라고 했다. 그 긴 글도 AI로 썼다고 적어 두었는데, 그런데도 조회수가 30만 가까이 나온 건 문장이 매끄러워서가 아니었다. 병원 뒷방에 들어선 서버랙이나, 보험 서류가 자동으로 맞춰지는 걸 본 직원이 「저 이제 잘리는 건가요?」 하고 물었다는 장면처럼 그 사람만 쓸 수 있는 이야기가 들어 있어서다.
해자는 남들이 못 만드는 데이터다
미국에 있는 오랜 친구와 통화하면서도 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친구가 보는 AI 시대의 해자는 남들이 만들 수 없는 데이터, 아니면 아직 아무도 하지 않은 생각이었다.
새로운 데이터가 있거나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어야 돼.
친구는 AI가 몇 년 안에 모든 걸 해결할 거라는 이야기도 무슨 근거로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AI가 돕는 건 해 볼 만한 후보를 더 빨리, 더 많이 골라 주는 데까지이고, 그 후보가 실제로 맞는지 확인하는 일은 여전히 현실에서 시간을 들여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실험을 대신해 줄 것도 아니고, 결국에는 사람이 해야 돼.
친구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도 그쪽에 있었다. 누군가 풀고 싶은 문제가 있으면 그 사람이 가진 데이터와 일하는 과정을 들여다보고, 그 과정을 AI가 대신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금요일 Mixer에서 들은 이야기도 같은 곳을 가리켰다. 물건을 만드는 회사의 AX가 끝까지 가면 결국 말하면 제품이 나오는 단계가 된다는 것이다. 말이 곧 도면이 되고 그 도면이 바로 생산으로 이어지는 흐름인데, 그 앞에는 일부러 모으고 정리해야 하는 현장 데이터라는 거대한 숙제가 남아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피지컬 AI가 아직 경쟁력이 없다고 한다. 피지컬 AI가 공장에서 제대로 일하려면 공장을 비롯한 현장의 모든 걸 먼저 데이터로 바꿔 놔야 하는데, 우리는 아직 그런 준비가 전혀 안 돼 있다고 한다. 소프트웨어와 콘텐츠가 그랬듯 피지컬 AI도 언젠가는 비슷한 길을 걷겠지만, 그때 남는 것도 결국 자기 현장의 데이터를 먼저 쌓아 둔 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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