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는 신뢰가 병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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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SLOP” 글자와 녹아내리는 캐릭터들이 그려진 일러스트

AI가 만든 것들에 점점 피로감을 느낀다는 미국에서 막 돌아온 창업자와 점심을 먹었다. 요즘은 스타트업들이 PR 자료를 AI로 대충 만들어 뿌리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그런 자료는 결국 효과가 형편없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살짝 AI slop 느낌 나는 순간 저 그냥 안 보거든요.

그는 AI가 쓴 티가 나는 글은 신뢰가 확 떨어진다고 했다. 나는 잘 쓴 글이란 문법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아이디어와 철학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런 글을 잘 쓰는 사람에겐 쓰는 일 자체가 재미라서, 자연스럽게 계속 쓰게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신발 하나를 사려고 AI 에이전트를 돌려 봤다가, 추천받은 상품이 마음에 안 들어 화가 나서 결국 안 샀다는 그는, AI 시대에 끝까지 남는 게 무엇일지 오래 고민해 봤고, 그 결론이 바로 취향과 신뢰라고 했다.

무엇이든 그럴듯하게 만들어지는 시대에 사람들은 오히려 그 ‘그럴듯함’부터 먼저 알아보고 피한다. 그 주에 만난 사람들도 결국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들이 기댄 것은 믿을 수 있는 사람과 믿을 수 있는 브랜드였다.

AI는 평균을 낸다

점심 Mixer에서 만난 분은 AI가 내놓는 결과는 결국 평균치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전문가라면 자기만의 감을 AI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긴 소설을 AI에게 맡기면 초반에 잡은 감정선을 끝까지 끌고 가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는데, 나 역시 AI가 정말 완성됐다고 볼 수 있는 시점은 장편 소설을 쓸 수 있을 때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미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일은 쉬워졌지만, 소설은 여전히 세상에 아직 없는 것을 지어내는 일이다.

AI는 세상에 이미 있는 것을 모아 정리하는 데는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지만, 아직 세상에 없는 이야기는 가져오지 못한다. 금요일 Mixer에서는 이 차이를 사람에게 가르치기조차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AI 티가 나니까 다시 해 와”라고 피드백을 해도, 그 차이가 눈에 안 보이는 사람은 끝내 고치지 못한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뉴진스로 넘어갔는데, 그런 히트는 데이터 분석이 아니라 한 사람의 강한 취향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나는 넷플릭스를 예로 들었다. 넷플릭스는 빅데이터로 오리지널 콘텐츠를 기획한다고 늘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만든 작품이 전부 대박 나는 건 아니다. 점심 Mixer에서 만난 분은 미감이란 결국 ‘팔리느냐’의 문제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돈을 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 수 있느냐가 미감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이수만 프로듀서가 새 걸그룹을 내놓으며 AI와 VR 기술을 한껏 보여 주면서도, 결국 가장 중요한 시작은 ‘곡’이라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AI가 콘텐츠를 쏟아낼수록, 사람에게 끝까지 남는 건 제대로 고르고 판단하는 눈일지 모른다. 기획사들도 언젠가 AI가 미감까지 해낼 거라며 준비는 해 뒀지만, 정작 AI 아이돌을 전면에 내세우진 못한다. 그렇게 하는 순간, 스스로 키운 아이돌, 곧 자신의 IP와 맞부딪히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믿는 순간 지갑을 연다

점심에 만난 창업자는 AI 시대일수록 신뢰를 기반으로 한 상품이 사랑받을 거라며 코스트코를 예로 들었다. 남기는 마진을 정해 두고 그 원칙을 지키는 회사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일이 따지지 않고 믿고 산다는 것이다. 그의 눈에 앞으로 살아남는 사업은 두 종류뿐이다. AI 에이전트로 사용자 유입을 폭발적으로 키워 아주 빠르게 성장하는 쪽과, 아주 천천히 신뢰를 쌓아 나중에 시장을 통째로 가져가는 쪽. 그 중간에 있는 사업들은 대부분 사라질 거라고 봤다. 그는 AI가 좋아질수록 사람들이 오히려 인간미를 찾아 되돌아갈 거라고도 말했다.

그는 사람을 소개하는 일도 믿을 만한 사람이 하면 돈이 된다고 봤다. 연애든 일이든, 잘 아는 친구가 “이 사람 괜찮아”라며 소개해 주면 대체로 잘 풀리는데, 이제는 AI를 통해 그 사람이 남긴 글과 기록을 모아, 어느 정도 평판을 미리 볼 수도 있을 거라는 것이다.

오후에 만난 개발자 친구는 브랜드가 쌓이는 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쉽게, 분명히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있는데도 그걸 포기하는 순간이 신념을 지키는 순간이고, 이런 순간이 반복해서 보일 때 비로소 브랜드가 된다는 것이다. 코스트코가 남기는 몫을 정해 두고 지키는 것도, 사실은 더 많이 남길 수 있는 수많은 순간마다 그 유혹을 포기해 온 결과다.

결정은 전화 한 통으로 난다

함께 Bloom을 꾸리는 동료는 이 이야기를 더 웃기게 정리했다. 행사 협업을 하려고 연락하면, 공간을 빌려주는 곳이든 함께하는 업체든 하나같이 기획안을 달라 하고, 끝나면 성과 보고서를 요청한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결정은 전화 한 통으로 이미 끝나 있고, 서류는 이쪽도 AI로 ‘딸깍’ 해서 보내고 저쪽도 ‘딸깍’ 해서 받는 식이라는 것이다. 각본이라는 걸 서로 알면서도 주고받는 프로레슬링 같다는 말이었다.

너도 WWE, 나도 WWE, 오케이. 서로 그냥 프로레슬링 하는 걸로 하자.

서류는 이제 AI가 얼마든지 써 줄 수 있지만, 그 서류를 ‘믿게’ 만드는 건 여전히 전화 한 통 사이에 오가는 사람과 사람의 신뢰다. 점심 Mixer에서 만난 분은, 모든 걸 다 자동화해도 결국 사람은 꼭 한 명은 남는다고 했다. 감사가 나왔을 때 “이 문제를 누가 책임질 거냐”는 질문에 AI는 답할 수 없으니, 책임지고 감독하는 사람이 한두 명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약 그 한 사람이 모든 일과 책임을 짊어지는 구조라면, 먼 미래에는 우리 모두가 각자 하나의 사업자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금요일 Mixer에서 Luma 이야기를 꺼냈다. 행사 페이지를 만드는 Luma는 기능만 놓고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앱이고, 비슷한 서비스는 국내외에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은 “Luma로 행사를 열어야 힙하다”는 말까지 나온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술이나 기능이 아니라, 브랜드에 대한 신뢰다.

문은 소개로 열린다

점심에 만난 창업자는 미국에서 콜드메일은 전부 무시당했고, 무조건 소개를 받아야 문이 열렸다고 했다. 업계에서 가장 작은 사람 한 명을 먼저 설득하고, 그 사람을 통해 중간급을 소개받으며 한 칸씩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확실한 길은, 만나고 싶은 투자사가 이미 투자한 회사의 대표와 먼저 친해지는 것. 그는 Bloom 같은 곳이 파는 것도 결국 같은 거라고 말했다.

사실 그냥 좋은 사람 만나는 게 제품이잖아요.

좋은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좋은 커뮤니티는 광고 없이도 입소문으로 큰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그는 Y Combinator에서 오래전부터 전해져 온 “Do things that don’t scale”이라는 문장도 꺼냈다. 확장되지 않는 일을 하라는 말이다. 사람을 직접 만나 믿음을 쌓는 일만큼 비확장적인 일도 없다.

금요일 Mixer에서 한 분이 들려준 이야기 역시 그랬다. 그는 Bloom 메인 행사에서 소모임을 하자고 하면 늘 도망갔다고 했다. 그런데 Mixer에 한 번 나와 편한 얼굴이 생기고 나니, 다음 메인 행사에서는 소모임에 남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AI가 홍보 자료도, 서류도, 콘텐츠도 끝없이 그럴듯하게 만들어 주는 지금, 고객이 마지막까지 따지는 건 “이걸 정말 믿어도 되느냐”이다. 그 믿음은 AI가 대신 쌓아 줄 수 없다. 결국 사람과 한 번 더 만나고, 한 번 더 대화하는 그 시간 속에서만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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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o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