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를 이길 수 없으니, 재밌는 걸 하기로 했다
올해 3월에 「Claude Blue - 실리콘밸리 전체가 우울하다」라는 글을 썼다. Claude가 개발자의 일을 무서운 속도로 대체하면서 실리콘밸리 개발자들이 깊은 우울에 빠졌다는 이야기였다. 며칠 전 책 모임에서 만난 형과 통화를 했는데, 국내 큰 IT 회사에서 일하는 개발자인 형의 이야기가 그 글과 맞닿아 있어서 평소보다 훨씬 몰입해서 들었다.
다만 형의 이야기는 우울에서 끝나지 않고, AI를 이길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인 다음에 무엇을 할지에 대한 형 나름의 답으로 이어졌다. 통화를 끊고 나서도 오래 생각이 남아 적어 둔다.
책에서 더 이상 궁금한 게 없다
책 모임 이야기를 하다가 형은 요즘 책이 잘 안 읽힌다면서, 뜻밖에 그게 AI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예전에는 책을 읽고 나서 얻는 효용감이나 그 자체가 되게 좋았는데, 요즘에는 다 AI로 가니까 그냥 책에서 궁금한 게 별로 없는 거야.
그래서 형은 정보를 얻으려고 읽는 책 대신 고전 소설이나 에세이처럼 읽는 행위 자체가 재밌는 책을 고른다고 했다. 요즘 붙잡고 있는 건 「백년의 고독」인데, 인물 관계가 너무 복잡하고 이름이 어려워서 펼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했다. 그래도 놓지 않는 이유는 문해력이 너무 떨어진 것 같아서였다. 한 줄 한 줄이 도전이지만 읽는 동안 계속 상상을 하게 되는데, 요즘은 다른 데서 상상할 일이 생각보다 별로 없다는 것이다. 좀 가벼운 쪽으로는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고 있다고 했다.
나는 최근에 「세이노의 가르침」이라는 책을 재밌게 읽었는데, 돌이켜 보면 재밌었던 이유가 형의 말과 같았다. 그 책은 바깥의 정보를 정리한 책이 아니라 한 사람의 굉장히 주관적인 생각이라서, 남의 블로그를 읽는 느낌에 가깝다. 반대로 방법론을 담은 책은 지금 같은 속도에서는 금방 낡는다. 형 말대로 이제는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부터 다시 골라야 하는 때가 됐다.
코드를 직접 안 쓴 지 1년이 넘었다
회사 일은 어떠냐고 물었더니 형은 예전 같은 맛이 없다고 했다. 예전에는 직접 만들면서 몰입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시간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내 코드를 직접 안 쓴 지가 1년이 넘었는데. 다 시키고 이제 나는 그냥 디렉션만 남기고.
대신 일의 아웃풋은 전보다 훨씬 많아졌는데, 문제는 그게 비즈니스로 딱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AI로 생산성이 높아졌는데 왜 매출로는 이어지지 않는지, 다들 상향 평준화가 돼서 그런 건지 물었을 때 형은 이렇게 되물었다.
원래 비즈니스가 어려워서 그런 거 아닐까?
예전에도 뭔가를 만들어 내는 사람은 많았고, 그중에 운이 좋거나 시장에 맞은 것이 살아남았다. 지금은 시도가 훨씬 많아졌을 뿐, 결과물이 줄 수 있는 가치가 시장과 맞지 않으면 안 되는 건 예전과 똑같다는 것이다. 형은 일반 SaaS 회사들이 특히 힘들 거라고 했다. 예전에는 다이어트 앱에 먹은 걸 기록하고 조언을 받았다면, 이제는 GPT 채팅창 하나를 열어 두고 오늘 이걸 먹었는데 다음엔 뭘 하면 좋을지 묻는다. 앱이 정해 둔 규칙을 벗어나 마음대로 이야기를 이어 갈 수 있으니 그걸 이기기가 쉽지 않다. 요즘 SaaS의 종말(SaaSpocalypse)이라는 말이 도는 이유를 이보다 쉽게 설명하기도 어렵다.
못 자르니까 안 뽑는다
형이 가장 무겁게 꺼낸 건 고용 이야기였는데, 미국은 AI가 들어오면서 한 번 대규모 해고의 물결을 거쳤지만 한국은 고용이 유연하지 않아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AI를 안 쓸 수도 없으니 회사는 직원마다 적지 않은 AI 비용을 대 준다. 사람은 그대로 두고 비용은 비용대로 나가니, 회사로서는 복지를 하나 더 얹어 준 셈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신입을 안 뽑지. 너무 자명하잖아. 비용을 더 늘릴 이유가 뭐가 있어.
작은 회사들에서는 이미 백엔드, 프론트엔드, 데이터 엔지니어를 나누지 않고 Product Engineer 한 명이 기획과 운영까지 맡는 식으로 변화가 시작됐다고 했다. 형은 큰 회사도 언젠가는 사람을 계속 안고 가는 비용보다 퇴직금과 패키지를 한 번에 주고 내보내는 쪽이 더 합리적인 판단이 되는 시점이 올 거라고 봤다.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것들이 하나씩 압박감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차라리 주 2일만 일하고 연봉도 그만큼만 받는 정규직 계약이 있다면 회사도 사람도 숨을 돌릴 수 있을 텐데, 지금은 그런 선택지가 아예 없다고 했다.
통화 중에 형이 슈카월드에 나온 이창용 전 한국은행 총재의 인터뷰 이야기를 꺼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형이 한 이야기와 겹치는 대목이 많았다. 이창용 전 총재는 AI 때문에 청년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했다. AI를 가장 잘 쓰는 건 막 졸업한 젊은 사람들이니,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면 중간 관리자를 줄이고 청년을 더 뽑는 쪽이 생산성에 맞는다는 것이다. 그는 노동 시장을 이미 좋은 직장에 들어가 제도의 보호를 받는 인사이더와, 새로 들어오려 하거나 정규직을 갖지 못한 아웃사이더로 나눠 설명했는데, 지금 제도는 인사이더를 지키는 쪽으로 너무 기울어 있다고 봤다.
근데 한국은 그렇게 못 해요. 임금이 연령 구조로 되어 있어서 마음대로 조직을 줄이거나 정리해고를 못 해요. 그러니까 결국은 어떻게 해야 돼요? 청년을 덜 뽑죠.
그렇게 겨우 들어온 청년은 월급은 적게 받으면서 윗사람에게 AI를 가르치는데, 정작 그 결과물을 들고 총재에게 발표하러 가는 건 윗사람이라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는 예전에 정년을 늘리면서 임금 구조는 그대로 뒀을 때 청년 채용이 줄고 결혼과 출산까지 함께 꺾였던 일도 예로 들었다. 그가 내놓은 해법도 형의 말과 닮아서, 정년을 늘리더라도 임금은 조정할 수 있어야 하고 매일 나올 필요 없이 일주일에 2~3일만 나와 거기에 맞는 월급을 받는 유연한 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기업 개발자가 통화에서 한 이야기와 전 한국은행 총재가 유튜브에서 한 이야기가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영상은 두 시간 가까이 되는데, 노동 시장 이야기는 1시간 12분쯤, AI 이야기는 1시간 24분쯤부터 나온다. 반도체 전문가 이야기는 시작하고 5분쯤 지나서다.
내 비관이 틀렸으면 좋겠다
이런 변화가 신나기도 하는지, 아니면 다들 같은 처지니 어떻게든 헤쳐 나가면 된다고 보는지 형에게 물었더니, 형은 대안이 없는 건 맞아서 계속 생각하다 보면 암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고 했다. 그래도 형을 붙잡아 주는 건 한국 노동 시장이 그렇게 급변할 것 같지는 않다는 점, 그리고 같은 인터뷰에서 들은 반도체 이야기였다. 이창용 전 총재는 1년여 전 삼성전자가 고전하던 무렵, 국내 반도체 전문가 20명 정도를 한 달에 걸쳐 만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 물었다고 했다.
그때 그분들 중에서 이렇게 슈퍼사이클이 온다고 얘기한 분은 없었어요.
그런데 같은 사람들이 이제는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10년 간다고 하니, 전문가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였다. 형은 그 대목을 거꾸로 받아들여서, 아무도 이 호황을 예측하지 못했다면 AI 때문에 일자리가 사라질 거라는 지금의 비관도 틀릴 수 있다고 했다. 이창용 전 총재도 같은 인터뷰에서, 기술이 바뀌면 단기적으로 일자리가 줄 수 있지만 새로운 노동이 생겨날 수도 있어서 AI로 노동 수요가 준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내가 생각하는 이 기류가 틀렸으면 좋겠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였으면 좋겠어.
IT 회사만 답은 아닐 수도 있다
형은 취업 준비생 멘토링을 하는데, 요즘 취업이 정말 힘들어져서 졸업을 미루고 버티는 스물일곱, 스물여덟 살 멘티가 가장 많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 한 멘티가 대형 회계법인 면접을 보고 왔다. 그 회계법인은 이제 회계사를 예전처럼 뽑지 않고, 대신 회사 전체를 AI로 전환해 줄 인하우스 개발자를 뽑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형 주변에도 글로벌 컨설팅사에서 AX 컨설턴트 자리를 제안하는 연락이 온다고 했다.
예전 같으면 사내 시스템 하나를 제대로 만드는 데도 앱 팀과 서버 팀까지 적어도 3개 팀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작은 엔지니어 팀 하나로도 꽤 많은 걸 만들 수 있다. 회계법인 같은 곳이 개발팀을 직접 데리고 있는 부담이 그만큼 줄었고, 형은 거기서 꼭 IT 산업만이 답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나는 AX가 얼마나 오래갈지 의문이었는데, 남의 회사가 AI 네이티브가 되도록 돕는 일은 학원 선생님과 비슷해서 학생이 공부를 잘해 졸업하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학원에는 새 학생이 계속 들어오지만 기업의 수는 정해져 있다. 형은 그건 좀 더 지켜봐야 한다면서도, 인하우스 팀은 AI를 들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예전엔 엄두도 못 내던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 생각보다 오래갈 수도 있다고 했다.
형의 회사 동료들도 각자 출구를 고민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인테리어 일을 하셔서 조금씩 배우고 있다는 사람도 있고, 와인을 너무 좋아해서 와인 수입이나 국내 재배를 알아본다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AI가 하기 힘든 영역으로 아예 직업을 옮기는 쪽으로 고민이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형은 결국 지금은 회사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했고, 나는 회사에 붙어 있거나 나올 거면 제대로 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답했다.
엔지니어가 낙관론자가 될 때
형은 원래 엔지니어라서 이런 이야기에 부정적인 편이었다고 했다. 자율주행 같은 걸 자기가 만든다고 생각하면 그게 되겠냐는 생각부터 들었고 윤리적인 문제도 크다고 봤는데, 지금은 실제로 되고 있어서 점점 낙관론자가 되어 간다고 했다. 집안일을 봐 주는 로봇도 이제는 가시권이고, 형은 이걸 완전히 뛰어넘는 무언가가 또 나올지 너무 궁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런 미래에서 내 아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냐고 묻는 형에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상상이 되지 않아 대답 대신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창용 전 총재는 해외 생활을 오래 했지만 우리 아이들만큼 불행한 아이들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유치원 때부터 영어 학원에 다니고 시험 점수 하나로 줄을 서는 경쟁을 누군가는 막아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경쟁의 끝에 있던 직업들이 지금 가장 먼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한숨이 더 길어진다.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사치
AI가 들어온 뒤로 형의 하루는 몰입하는 시간보다 세션 10개를 동시에 붙잡고 정신없이 돌리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했다. 그게 묘미라면 묘미지만, 그래서인지 형은 의미는 없어도 그냥 해서 재밌는 것들을 일부러 찾는다. 집에 있는 스위치로 게임을 하고, 원래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면 다시 그림을 그린다. AI가 훨씬 잘 그리겠지만 그리는 행위 자체가 흥미롭다는 것이다. 나는 그게 인간으로서 마지막 남은 사치가 아니냐고 물었다.
예전에 누가 말하면 이건 그냥 취미네 할 수 있는데, 지금은 몰라. 취미밖에 누릴 수 있는 게 없어. AI가 다 해 버리는데, 나는 얘를 이길 수 없어. 그래서 그냥 내가 재밌는 걸 해야 돼.
형은 이세돌 9단이 AI 때문에 은퇴한다고 했을 때 그게 어떤 느낌인지 잘 몰랐는데, 개발을 하면서 그 느낌을 간접적으로 알게 됐다고 했다. 수학자들은 AI가 난제를 풀어 버리는 걸 지켜보고 있고, 변호사는 더 심하고, 의사들도 이미 AI를 많이 쓴다.
어떤 지식 기반을 가지고 인풋을 넣어서 모델을 이용해서 아웃풋을 냈던 사람들이 다 AI한테 조져지고 있으니까. 이걸 거꾸로 했어야 되는데. 아, 그냥 나도 인테리어 할걸.
지식으로 먹고사는 일의 꼭대기에 있던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창용 전 총재는 「AI가 빠르게 발전하는데 내가 살날이 얼마 안 남아 다행」이라고 했던 말의 뜻을 묻자, 60대 후반이라 새로운 걸 배우기가 굉장히 어렵다고 털어놨다. 정책을 하려면 알아야 하니 새 AI가 나올 때마다 Claude를 써 보는데 체력이 따라가지 않고, 그래서 이제는 정책을 맡는 사람의 나이가 많이 낮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싫어하는 것부터 하나씩 쳐낸다
이창용 전 총재는 그 인터뷰 끝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젊은 구독자들에게 이렇게 답했다.
네가 좋아하는 걸 해라. 돈도 관계없고 명예도 관계없고 정말 좋아하는 걸 해라. 좋아하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면, 싫어하는 건 알거든요. 싫어하는 거 하나씩 하나씩 쳐내라.
인터뷰 첫머리에는 슈카가 20년 전 그의 수업을 딱 한 시간 듣고 나온 이야기가 나온다. 첫 시간에 그가 공부를 열심히 할 생각이 없는 사람은 지금 나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부만 열심히 했다면 슈카가 로스쿨에 갔을 텐데 지금 이런 일을 하는 게 자랑스럽다고 했고, 다시 강의를 하게 되면 이번에는 말을 바꾸겠다고 했다. 같이 놀고 싶은 사람과 세상을 알고 싶은 사람은 남고, 공부만 하려는 사람은 나가라고 하겠다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느냐는 질문에는 조용히 혼자 그동안 못 읽었던 책을 본다고 했다. 형이 「백년의 고독」을 한 줄씩 붙잡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Claude Blue」를 쓸 때 내가 기록한 건 우울이었는데, 이번 통화에서 들은 건 그다음 이야기였다. 이길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인 사람은 싫어하는 걸 하나씩 쳐내면서, 그냥 해서 재밌는 걸 찾고 있었다. 다음 책 모임에서는 형이 「백년의 고독」을 끝까지 읽었는지부터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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