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전트가 결제하면 책임은 누가 지나
KBW 기간을 맞아 해외에서 수많은 기업들이 한국을 찾았다. Bloom 커뮤니티는 블록체인 중심은 아니지만, AI와 맞닿은 지점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협업하려 한다. 그러던 중 Ripple, t54, Tenity와 함께 「Agentic Payments Onchain」을 공동 주최하는 기회를 얻었다. Bloom은 AI 에이전트가 사람을 대신해 블록체인 위에서 결제할 때 필요한 기술만큼이나, 실제 현실에서 법적으로 어떤 이슈가 발생하는지 짚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평소 행사에 자주 함께해 주시는 넥스트증권과 대담을 마련해 이야기를 나눴다.
스마트 컨트랙트 없이 기능을 코어에 넣은 블록체인
Joel Mun 님은 스스로를 개발자를 돕는 개발자라고 소개하며 XRP Ledger 이야기로 문을 열었습니다. 14년에서 15년째 운영되며 속도와 비용, 안정성이 검증됐고 소스 코드가 전부 공개돼 있다는 기본 소개 뒤에 이어진 대목이 이 블록체인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줬습니다. 다른 블록체인은 대개 스마트 컨트랙트로 애플리케이션을 만드는데, XRP Ledger에는 스마트 컨트랙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애플리케이션을 어떻게 만드냐는 질문을 많이 하시는데, 저희는 블록체인 코어에 기능을 다 넣어놨습니다. 그래서 개발자로서 해야 할 건 연결하는 것뿐이에요.
송금도, 토큰 발행도 이미 코어에 들어 있으니 연결해서 API를 쓰면 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에이전트 결제도 이미 XRP Ledger 위에서 적잖이 일어나고 있어서, 그날 확인해 보니 x402 트랜잭션이 900만 건 찍혀 있었다고 했습니다. 1~2주 전에는 에이전트 결제와 AI 개발에 필요한 도구를 모은 XRPL AI Starter Kit을 1.2 버전으로 내놨고, t54가 x402 SDK를 오픈소스로 만들었으며 Stripe와 Tempo가 만든 MPP SDK도 지원합니다. XRP를 에이전트 결제에 바로 쓸 수 있고, Ripple이 발행하는 스테이블코인 RLUSD도 약 23억 달러 규모로 에이전트 결제에 쓰이고 있다고 했습니다. 경쟁 스테이블코인에 비하면 아직 뒤쫓는 단계라는 말도 굳이 덧붙였습니다.
이어서 Tenity의 김보민 님이 그날 아침 싱가포르에서 날아왔다며 짧게 인사했습니다. Tenity는 스위스 취리히에 본사를 두고 싱가포르를 포함한 6개국에서 스타트업과 금융기관을 PoC와 파일럿으로 연결하고 투자까지 하는 곳이고, 2023년부터 Ripple과 함께 XRP Ledger 생태계의 빌더를 지원해 왔습니다. 에이전트가 거래를 대신하게 될수록 사람 사이의 신뢰가 더 중요해지니, 좋은 기업을 찾고 맞는 파트너를 이어주고 안정적인 인프라 위에서 자라게 돕는 것이 에이전트 시대에 자기들이 맡을 역할이라고 했습니다.

에이전트가 쓴 돈은 누가 책임지나
t54의 Claire Jung 님은 시간이 5분뿐이라며 빠르게 달렸습니다. t54는 실리콘밸리에 기반을 둔 AI 핀테크 스타트업인데, 에이전트 결제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결제 회사가 아니라는 점부터 분명히 했습니다. 금융 시스템과 서비스 제공자 사이에서 위험을 관리하는 신뢰 계층을 만드는 회사이고, Ripple은 투자사이자 고객사이며 마스터카드가 파트너라고 했습니다.

기관을 겨냥한 제품인 Trustline은 먼저 에이전트가 누구인지를 보는데, 에이전트 자체만이 아니라 누가 그 에이전트를 소유하고 어떤 실행 환경에서 돌아가는지까지 봅니다. 해커가 에이전트를 소유하고 있다면 그대로 망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이 사용자가 맡긴 범위, 마지막이 나중에 분쟁이 생겼을 때 쓸 근거입니다.
에이전트한테 10달러짜리 골프화를 사달라고 했는데, 얘가 제멋대로 100달러, 1,000달러를 쓸 수도 있잖아요.
그 행동이 정말 사용자가 맡긴 것인지를 다시 확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제가 끝난 뒤 카드사에 이의를 제기해 돈을 되돌려받는 차지백이 에이전트 결제에서도 생길 텐데, 그때 무엇을 증거로 어떻게 해결할지는 아직 아무도 정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붙었습니다. 개발자를 위한 XRPL AI Hub에서는 실시간 거래 현황과 온보딩된 판매자 목록을 볼 수 있고, XRP Ledger 기반으로 제품을 만든다면 판매자로 직접 등록해 심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사이트는 AI로 번역한 뒤 검증해 한국어도 지원합니다.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t54 창업자 Sergio Chan 님이 영어로 보여줬습니다. 추상적인 개념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실제 거래를 보여주겠다며, 코드를 한 줄도 쓰지 않고 Codex에 준비해 온 자연어 프롬프트 몇 개만 넣어 리서치 에이전트를 만들었습니다. 에이전트는 XRPL AI Hub에서 유료 추론 서비스를 스스로 찾아 DeepSeek 모델을 고르고 x402 견적을 받아왔습니다. 지출 한도를 0.01 RLUSD로 걸었는데, 이건 가격이 아니라 상한이고 실제 가격은 판매자가 매기는 대로 움직이는 동적 가격이라는 설명이 붙었습니다. 권한을 넘기자 에이전트가 질문에 답하는 동시에 XRP Ledger 메인넷에서 실제 결제를 끝냈고, 익스플로러에서 그 거래와 인보이스 ID가 담긴 메모를 바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Sergio 님은 코딩을 몰라도 판매자가 되어 에이전트에게 서비스를 팔고 돈을 벌 수 있는 때가 왔다는 말을 두 번 반복했습니다. x402는 Base나 Solana에서도 돌고 비자와 마스터카드도 받아들이고 있는데, XRP Ledger에서 다른 점으로는 두 가지를 꼽았습니다. 판매자가 원하면 모든 에이전트 거래가 기본으로 t54의 위험 심사를 거친다는 것, 그리고 신용 계정입니다. XRP Ledger는 지갑마다 1 XRP를 준비금으로 넣어둬야 해서 에이전트에게 자연스러운 진입 장벽이 되는데, 신용 계정을 쓰면 지갑을 만들지 않고도 XRP Ledger의 AI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객석에서 지금 가장 돈이 되는 사업이 뭐냐는 질문이 나오자, 사람에게 물과 음식이 필요하듯 에이전트에게는 추론과 연산이 필요하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추론과 연산, 그리고 OpenAI와 Anthropic 말고 더 싼 대안을 주는 모델 중개 서비스가 가장 필요하고 돈이 되는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Meta가 최근 Muse를 내놨고 그 전에 Instinct라는 서비스가 있었던 것처럼, 두세 달 안에 사람들이 장보기와 예매를 에이전트에게 맡기는 흐름이 올 수 있다며 그러면 전통 비즈니스도 사람이 아닌 에이전트에게서 오는 트래픽으로 돈을 버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KYT 같은 기존 자금세탁방지 서비스와 무엇이 다르냐는 질문에는 KYT와 KYC, KYA가 모두 위험 엔진에 들어가는 신호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답했습니다. 위험 서비스의 가치는 승인할지 거절할지의 결정과 위험 수준, 그리고 나중에 책임과 분쟁을 가릴 때 쓸 증거에 있고, t54는 KYT 서비스를 둘 이상 신호원으로 붙여 쓰는 집계자에 가깝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법정화폐 거래도 에이전트 거래일 수 있어서 마스터카드와 함께한다는 말도 이어졌습니다.
가장 선명한 답은 핵심 개념이 아직도 안 잡힌다며 Muse를 예로 쉽게 설명해 달라는 질문에서 나왔습니다. 트위터에는 에이전트가 항공권을 잘못 예약해 취소 수수료를 사용자가 떠안았다는 불만이 이미 쏟아지고 있는데, 신용카드였다면 사정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카드를 맡겨 항공권을 샀는데 잘못 샀다면 카드사에 분쟁을 신청할 수 있고 카드사가 손실을 책임집니다.

에이전트는 이 흐름에 새로 들어온 참여자인데, 그 책임을 명확히 정해 둔 곳이 아직 아무 데도 없습니다.
t54가 어떤 거래를 승인하고 보증했다면, 사용자가 분쟁을 신청할 때 카드사 역할을 하는 게 자기들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소비자와 판매자 양쪽을 동시에 보호하는 장치라는 것이고, 마스터카드도 바로 그 빈자리를 봤기 때문에 함께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왜 카드가 아니라 블록체인인가
패널에는 Four Pillars에서 x402를 다룬 120쪽짜리 리포트를 쓴 유준혁 님, 퓨처웍스랩 대표이자 인하대 방문교수이며 재정경제부 AI 에이전트 커머스 분야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이선민 님, DSRV에서 웹3 개발과 AI TF를 이끄는 엄정용 님이 올랐습니다. 첫 질문은 카드 네트워크도 있고 결제 수단이 여러 가지인데 에이전트 결제에 왜 굳이 블록체인이 필요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유준혁 님은 x402가 카드와 경쟁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x402는 코인베이스가 만들었고 올해부터 리눅스 재단이 주관하는데, 여기에 비자와 마스터카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를 비롯해 AWS와 클라우드플레어까지 50여 곳이 참여했습니다. 워킹그룹 가운데 비자와 마스터카드가 이끄는 카드 쪽 그룹이 따로 있을 만큼 카드 네트워크를 품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자와 마스터카드는 이미 에이전트 결제용 프로토콜을 준비해 두었는데, 에이전트에게 카드 정보를 통째로 맡기면 위험하니 중간에 카드 정보를 대신 다루는 중개자를 두는 방식이고 x402도 이 방식을 쓰고 있습니다.
에이전트 세상에서 어떤 상황이 오든, 그 상황에 맞는 결제 수단을 에이전트가 갖고 있지 않으면 그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 결제 중립성을 해결하는 것이 x402의 가장 큰 매력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엄정용 님은 블록체인이 원래 익명성을 전제로 만든 기술이라는 점을 짚었습니다. 32바이트짜리 개인 키 하나만 갖고 있으면 결제 수단을 가진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반면 카드나 은행 계좌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상으로 만든 것이고, 지금 준비되는 에이전트용 금융 시스템도 결국 뒤에 사람이 있다는 가정 아래 그 사람에게 위임받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에이전트가 결제 수단을 온전히 주체적으로 가질 수 있는 곳은 블록체인이고, 에이전트 결제는 에이전트 경제와 에이전트 금융으로 넘어가는 시발점이라고 봤습니다.
여기에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돈이라는 관점을 덧붙였습니다. 에이전트를 써본 사람이라면 에이전트가 일을 받으면 스스로 스크립트나 프로그램을 짜서 쓰는 모습을 봤을 텐데, 돈도 그렇게 조합해 실행할 수 있어야 에이전트가 제대로 일할 수 있고 그 도구가 블록체인에 더 잘 준비돼 있다는 것입니다.
이선민 님은 그날 낮에 인하대 학부생들과 「디지털 자산의 이해」 수업을 하고 왔다며 학생들과 나눈 문답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에이전트끼리 거래하는 시대에는 기계가 알아듣는 돈이 필요하고 그게 스테이블코인이 될 거라고 하면, 그냥 선불 충전해서 쓰면 되지 않느냐는 질문이 꼭 나온다고 합니다.
스타벅스에 충전하면 되죠. 그런데 그건 스타벅스에서만 써요. 네이버페이에 충전하면 되죠. 그런데 그걸로 아마존에선 못 사잖아요. 내 에이전트는 한국에서만 거래하지 않아요.
충전금은 쓸 수 있는 곳을 가두고, 에이전트가 잠도 안 자고 전 세계를 돌며 좋은 걸 찾아내도 결제를 못 하는 상황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로는 머지포인트와 티메프 사태를 들었습니다. 중간에 누가 있다는 것 자체가 위험일 수 있고, 블록체인은 누구도 믿지 않아도 믿을 수 있게 만든 기술이라는 것입니다. 충전금이라면 아들에게 용돈을 줄 때 쓸 곳을 정해 충전해 줘야 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이라면 10시 이후에는 결제가 안 된다는 식으로 규칙만 주면 됩니다. 디지털 세계는 오프라인보다 위변조가 훨씬 쉬워서, 디지털 위에서 신뢰를 증명하려면 결국 블록체인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봤습니다.
쇼핑보다 API 시장이 먼저 열린다
그러면 에이전트 결제는 어디서 먼저 쓰일까요. 유준혁 님은 구글의 Universal Commerce Protocol 안에 에이전트 결제 프로토콜 AP2가 있고 거기서 x402 결제도 되지만, 일반 쇼핑에는 아직 잘 맞지 않는다고 봤습니다. 블록체인 거래는 되돌릴 수 없는데, 잘못 산 물건을 환불하거나 배송 사고로 차지백이 생기면 어떻게 대응할지가 문제입니다. 한국은 에이전트가 결제할 때 결제 주체가 에이전트인지 아닌지조차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대신 미국에서 보이는 건 API 시장입니다. 본인이 최근 확인한 x402 결제액이 약 5,510만 달러인데 그 대부분이 API 시장에서 나왔고, 1위는 API를 사고파는 BlockRun AI라고 했습니다. 클로드나 ChatGPT를 구독하려면 인증 정보와 여러 절차가 필요한데, BlockRun AI는 x402로 돈만 내면 원하는 모델에 요청을 중개해 답을 받아다 줍니다. 규제나 권한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옷이나 TV를 사는 커머스보다, 작지만 빠른 응답이 필요한 시장에서 스테이블코인의 소액 결제가 가장 큰 강점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엄정용 님은 클라우드플레어의 Pay Per Crawl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웹 크롤러가 사이트를 긁어갈 때 사이트가 할 수 있는 대응은 막거나 그냥 열어두거나 둘뿐이었는데, Pay Per Crawl은 긁어가려면 돈을 내라는 세 번째 선택지를 만들었습니다. 크롤러가 페이지에 접근하면 402 응답을 받고, x402로 결제하면 그때 크롤링할 권한을 얻는 방식입니다. 이걸 꺼낸 이유는 Pay Per Crawl이 큰돈이 된다는 게 아니라, 원래 방법이 없던 시장이 열렸다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막아두거나 계약이 복잡해서 못 열던 데이터나 API를, 단건 거래로 가볍게 에이전트에게 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하기엔 손이 너무 많이 가고 가치가 너무 작아서 아무도 안 하던 일이 분명히 있는데, 예전 봇은 정량적인 것만 가져올 수 있었다면 지금 에이전트는 정성적인 판단까지 합니다. 그래서 전에는 잡아낼 수 없던 작은 가치를 에이전트로 더 낮은 비용에 만들어내는 시장이 열릴 거라는 전망이었습니다.
이선민 님은 한국의 현실로 분위기를 돌려놨습니다. 자문회의에서 결제 이야기를 꺼내면 에이전트도 없는데 무슨 결제냐는 말부터 듣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직 「너 뭐 써?」를 물어요. 미국은 「너 에이전트 몇 개야? 네 일을 대신하는 에이전트가 몇 개야?」를 물어요.
챗봇, 추론, 에이전트, 혁신, 조직으로 이어지는 AGI 다섯 단계로 치면 한국은 아직 2단계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에이전트 결제가 1년 사이 7배 늘었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네이버가 석 달째 에이전트 쇼핑을 하고 있어도 아무도 모릅니다. 네이버 안에서는 되지만 외부 에이전트가 들어올 수 없게 막혀 있어서입니다. 그래서 정책 제언을 쓰고 있다며 몇 가지를 들었습니다. 내 에이전트에게 사기를 치는 프롬프트 인젝션, 예를 들어 출장 숙소를 잡으러 간 에이전트 앞에 가짜 트립닷컴 에이전트가 나타나거나 50만 원 한도를 넘겨 결제하게 만드는 일을 막는 규칙이 필요하고, 결제가 잘못됐을 때 누구 책임인지도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한국에는 에이전트가 돈을 들고 가도 살 API 시장 자체가 없어서, API를 열어달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환불과 지출 한도는 어디서 막나
비어 있는 부분은 어디서 채워야 할까요. 엄정용 님은 x402 명세에 환불 개념이 없다는 지적에 대해, 필요하다고 보는 부분은 프로토콜에 계속 추가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문서에는 단건 결제와 일정 금액까지 결제하는 방식, 오프체인 정산이 소개돼 있는데 구현을 들여다보면 승인 후 청구하는 방식도 있고 커머스 단의 환불도 연구되고 있습니다. 프로토콜이 끝내 품지 않는 부분은 서비스와 인프라 단에서 고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출 한도는 이미 여러 층에서 다룰 수 있습니다. 구글의 AP2에서는 위임을 만들 때 넣는 한도가 곧 지출 한도이고, DSRV도 에이전트 인프라에 건별 한도와 하루 한도를 둬서 에이전트가 쓰는 도구 단에서 막습니다. 블록체인에서는 스마트 계정이 있어서 단건 결제 한도나 24시간 한도, 하루 결제 횟수 같은 제한을 계정 자체에 넣을 수 있습니다. Stripe와 Tempo가 만든 MPP에는 결제 유형을 직접 정의할 수 있는 커스텀 타입이 열려 있어, 필요한 규칙을 담은 결제 방식을 스스로 만들어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선민 님은 KYC 다음으로 떠오른 KYA, 에이전트를 알아보는 일을 풀었습니다. 은행에서 신분증을 내는 게 KYC라면, 내가 결제하지 않고 내 에이전트가 결제하는 시대에는 이 에이전트가 누구의 명령을 받아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부킹닷컴과 거래해야 할 에이전트 앞에 가짜 부킹닷컴이 나타나면 그걸 가려내야 하는데, 이선민 님은 여기서 평판이 가장 중요해질 거라고 봤습니다. 과거에 어떤 거래를 했고 그게 여행이나 항공 관련이었는지 같은 이력을 쌓아두는 것이고, 이더리움 쪽에서도 에이전트의 평판과 행동 이력을 남기는 표준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사람을 증명하는 문제도 다시 떠오르고 있는데, 미국에서는 가짜 학생 행세를 하는 에이전트로 수강료를 내고 과제를 내며 국가 보조금을 타간 일이 벌어져 캘리포니아 주에서만 1,000만 달러가 털렸다고 했습니다. 샘 올트먼이 월드코인으로 사람 증명 이야기를 2018년부터 했다는 걸 듣고, 이 사람은 생각이 다 있었구나 싶었다고도 했습니다.
유준혁 님은 x402의 주문 흐름을 짚었습니다. x402의 가장 큰 장점은 판매자가 블록체인 결제 인프라를 몰라도 엔드포인트만 열어두면 중개자가 결제를 처리해 준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중개자가 낀다는 건 누가 먼저 돈을 주고 누가 먼저 서비스를 하느냐가 달라진다는 뜻이고, 지금 명세는 모두가 착하다는 전제에서 결제를 받기 전에 작업부터 합니다. 마음먹고 나쁜 짓을 하려면 가짜 결제로 판매자의 자원만 잔뜩 쓰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클라우드플레어처럼 판매자가 사기 칠 일이 없는 빅테크라면 먼저 결제를 받아도 되고, 흐름 자체는 판매자가 언제든 바꿀 수 있습니다. 다만 그렇게 바꿨을 때 에이전트가 그 서비스를 어떻게 판단할지는 또 다른 문제라, 결국 에이전트와 판매자 사이의 신뢰 점수가 아주 중요해지는 때가 올 거라고 봤습니다.
한국은 아직 에이전트 이전 단계다
마지막 주제는 이게 정말 가능한 이야기인지, 가능하다면 언제인지였습니다. 이선민 님은 타임라인은 없다며 웃었습니다. 5년치 계획을 적어 냈지만 통과됐는지는 모르고, AGI가 2030년에 온다는 말이 도는 판에 5년 뒤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대신 1999년 전자서명법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전자상거래가 발달하지 않았지만 전자서명법과 공인인증서로 인프라를 먼저 깔자 한국 상거래가 엄청난 속도로 올라왔습니다. 문제는 그다음 20년을 액티브X에 발목 잡혔다는 것이고, 드라마 속 천송이 코트를 사고 싶던 중국 소비자들이 결제가 안 돼 못 산 일이 대표적입니다.
빨랐지만 한국만의 표준을 따로 만들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어요. 아무도 따라 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재정경제부에서는 x402 같은 국제 표준 논의에 한국이 지분을 갖고 참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만들어주면 쓰면 되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지만, 지분이 있어야 다음에 무엇을 만드는지 알고 준비할 수 있고 한국 상황과 맞지 않는 부분에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준혁 님은 2015년의 21.co로 돌아갔습니다. Balaji Srinivasan이 공동 창업했고 훗날 코인베이스가 인수한 이 회사는 비트코인으로 소액 결제를 하는 에이전트 시장을 만들려다 실패했습니다. 처음엔 수수료가 1달러 미만이었지만 2015년 중후반 비트코인 관심이 폭발하면서 상황이 뒤집혔다고 합니다.
1,000원짜리 서비스 하나 사는데 수수료가 100달러가 나오면,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누가 만든 API를 굳이 그 마켓에서 살 이유가 없었으니 수요도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다른 점으로는 수 센트에 거래를 빠르게 처리하는 고성능 블록체인이 여럿 생겼다는 것과, 에이전트라는 소비층이 나타났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에이전트를 쓰는 입장에서 체감 온도 차이가 아직 크긴 해도, 잠재 고객이 나타난 이상 관심을 두고 지켜봐야 나중에 흐름이 왔을 때 뒤처지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엄정용 님은 낙관론의 근거를 양과 질로 나눴습니다. Meta가 Muse를 무료로 풀겠다고 했고 한국도 1인 1에이전트 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했으니 에이전트 접근성은 계속 좋아질 것입니다. 질적으로도 GPT-6 Astra로 게임을 만들어보면 예전처럼 이상한 폴리곤 덩어리가 아니라 디테일까지 살아 나오고, 윌 스미스가 스파게티를 먹던 이상한 영상 시절과 달리 AI로 만든 광고와 쇼츠, 드라마가 늘고 있습니다. 유료 API 수요가 커질 거라고 보는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다들 ChatGPT든 클로드든 똑같은 걸 똑같이 결제해서 쓰잖아요. 그렇게 만든 결과물이 옆 사람이랑 다를 거라고 확신하실 수 있으세요? 아닐 거예요. 거의 다 똑같이 나와요.
무료로 긁어올 수 있는 데이터의 가치는 한정적이고, 조금이라도 더 가치 있는 걸 만들려면 비용을 들여 더 가치 있는 데이터를 넣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에이전트가 그 데이터에 쉽게 접근하고 결제할 수 있어야 하니, 유료 API와 데이터 시장의 수요는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마무리 발언에서 세 분의 온도는 조금씩 달랐습니다. 엄정용 님은 안 되던 것들이 열리는 시장이라 기회가 많다고 했고, 유준혁 님은 결제 규모가 커지는 건 부정하지 않지만 그 안에서 블록체인이 해자를 가질지는 별개의 문제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에이전트도 기본값으로는 카드를 쓸 테니, 스테이블코인과 딱 맞는 API 시장 같은 새 시장을 파고들거나 클라우드플레어 같은 빅테크가 적극적으로 끌고 가주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는 냉정한 진단이었습니다. 이선민 님의 마무리는 한 문장이었습니다.
온다,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발짝 앞서면 망해요. 반 발짝만 딱 앞서서 병목을 잡아야 돼요.
AI가 한 결제도 내가 한 결제다
Bloom 순서에서는 김준수 님이 커뮤니티를 짧게 소개한 뒤 넥스트증권 준법감시인 조수한 님과 대담을 이어갔습니다. 개발자들이 기술적으로 되는지 안 되는지를 고민한다면 비즈니스를 하는 쪽은 한국에서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를 고민하게 되는데, 그 이야기를 변호사에게 들어보자는 취지였습니다. 조수한 님은 증권사 최연소 준법감시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원래 법관을 지망했지만 사법연수원 시절 두바이 파견에서 비즈니스 세계를 보고, 앞으로 변호사가 일할 곳이 여기 많겠다 싶어 한화생명과 카카오뱅크, 크립토 트레이딩 회사를 거쳐 증권사까지 왔다고 했습니다.

AI가 물어보고 내가 승인하면 괜찮고 혼자 알아서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도는데 법의 기준선은 어디냐는 질문에, 근본적으로 금지되거나 제약이 있는 건 아니라는 답이 먼저 나왔습니다. 기본은 자기책임의 원리입니다. 유엔 국제상거래법위원회가 채택한 자동화 계약 모델법은 AI를 이용한 계약의 형성과 이행을 법적으로 인정하면서 자동화된 수단을 차별하지 말라고 정했고, 한국의 전자문서 및 전자거래 기본법 제7조도 자동으로 전자문서를 주고받도록 구성된 컴퓨터 프로그램이 보낸 건 작성자가 보낸 것으로 본다고 규정합니다.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아주 빈번하게 매매하고 결제하고, 내가 자는 사이에 무언가가 일어나더라도, 계약 상대방 입장에서는 내가 스스로 한 행위와 똑같이 취급하는 게 국제적인 합의입니다.
무엇이 금지되는지는 에이전트를 누가 만드느냐에 달렸다고 했습니다. 증권사에는 원래 알고리즘 트레이딩과 퀀트처럼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초당 수십 번씩 거래하는 방법이 있었고, 사용자가 스스로 구성해 쓰는 건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그 알고리즘을 남에게 팔면 한국에서는 투자자문업이나 투자일임업 인가가 필요합니다. 인스타그램에서 트레이딩 봇을 파는 사람들이 소프트웨어를 판 것뿐이라고 주장해도, 법은 그들을 유사투자자문업자로 보고 규율한다는 것입니다.

선을 넘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김준수 님이 자기 경험을 하나 털어놨습니다. 요즘 식당 예약을 Codex에 맡기는데, 금액과 룸, 인원, 거리 조건을 다 넣어줬더니 에이전트가 네이버 톡톡 문의하기로 들어가 사장님에게 그 조건을 전부 늘어놓으며 되느냐고 물어봤다는 것입니다. 당황해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다고 사과하고 껐다고 했습니다.
조수한 님은 환불 프로토콜처럼 착오나 어뷰징을 막는 장치들이 개발되고 있지만 아직 정돈되지 않은 위험 영역이라고 봤습니다. 스스로 뛰어든 사람은 그 위험을 인수할 용의가 있는 것으로 보고, 제대로 짜지 못해 생긴 우발적인 결과는 본인이 떠안는 게 원칙입니다. 한국 전자금융거래법은 결제 시스템에 오류가 생기면 사업자가 최선을 다했어도 책임지는 구조가 있는데, 에이전트는 개개인이 만들기 때문에 프로토콜을 만든 인프라 운영자도, 우리가 익숙한 중앙화 플랫폼도 다 책임을 질 수가 없습니다. 상대방 잘못으로 문제가 생겨도 결국 내가 그 사람에게 직접 책임을 물어야 하는 어려움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스테이블코인 결제가 막혀 있는 이유
미국은 에이전트가 스테이블코인으로 알아서 결제하는 서비스가 나오는데 한국은 왜 안 되느냐는 질문에, 조수한 님은 앞서 유준혁 님 말처럼 스테이블코인과 에이전트 결제는 별개의 의제라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스테이블코인은 한국에 아직 자리 잡을 법적 근거가 없습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과 유통 규제는 이야기가 나온 지 2년째 입법이 공전하고 있고, 미국은 GENIUS Act로 근거를 마련했습니다. USDT 같은 스테이블코인이 존재는 하지만 다루려면 가상자산사업자로 신고해야 하고, 가상자산으로 지급결제업을 하는 것도 가능은 하지만 생태계가 없어 한국에는 거래소와 커스터디, 지갑 사업자 세 가지만 있습니다.

정부가 요구하는 규제 수준을 맞추기도 빠듯한데 수익이 나지 않으니 신규 인프라에 투자할 여력이 없고, 네이버페이를 가진 네이버 같은 큰 기업도 가상자산사업자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니 모두 출발선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에이전트 결제는 개념적으로 지금도 가능하고 실험도 사업화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피해 구제나 착오를 해결하기엔 많이 부족합니다. 중앙화된 사업자가 없으니 전자상거래법이 보호해 주기 어렵고, 전자금융거래법도 이 생태계에 맞는 법이 아니며, 전자서명법은 아주 기초적인 개념만 줍니다. 그래서 여기에 뛰어드는 사람은 법적 보호 없이 사업을 하고 소비자로서도 참여해야 합니다. 민간에서 활발해지면 금융소비자 보호가 가장 중요한 금융위원회가 중앙화된 시각으로 제도를 설계하려 할 것이고, 그러면 제도가 따라오는 데 또 시간이 걸릴 거라는 전망이었습니다. 선투자했다가 버티지 못하는 사업자들에 대해서는, 2017년부터 2022년까지 국내 가상자산사업자의 재무구조를 보면 거래소 한두 곳을 빼고는 수익 모델 없이 제도가 마련되길 4~5년 기다리며 스스로 투자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곳이 거의 없다고 했습니다.
미래에셋이 코빗을 인수한 것처럼 증권사들도 온체인 시대를 준비하느냐는 질문에는, 증권사는 지금 있는 자본시장에서 투자로 편익을 주는 곳이라 새 프로토콜을 가장 앞서 연구하는 쪽은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대신 블랙록이 비트코인 ETF를 먼저 만들었듯 가상자산을 투자할 만한 자산군으로 먼저 봤고, 미국에서는 거래소를 거쳐 스테이블코인으로 주식을 사고파는 일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습니다. 증권사의 주된 관심은 증권화할 수 있는 모든 자산을 토큰화하는 것인데, 토큰화하면 신원 확인이 쉬워지고 거래가 기록으로 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AI 에이전트에게 결제나 매매를 맡겨보려는 사람에게 이것만은 지키라는 조언을 청하자, 조수한 님은 위험 한도를 먼저 정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가장 앞선 사람은 아니니 누군가 권하고 도와주는 기준이 필요하지만, 그 안에서도 결국 스스로 정해야 할 선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책임질 수 있는 한도를 잘 설정해서,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와도 내가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그걸 프로토콜이든 알고리즘이든으로 만들어 두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구제할지는 앞으로 정부와 입법자가 많이 고민해야 할 문제이고, 지금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예방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넥스트증권은 지금 MTS를 준비하고 있는데, AI 에이전트로 자기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고객을 핵심 사용자로 정해 API 트레이딩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편한 플랫폼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했습니다.

t54는 보증과 증거로, 프로토콜은 한도와 환불 장치로, 법은 자기책임의 원리로 같은 질문에 답하고 있었습니다. 에이전트가 쓴 돈을 누가 책임지느냐는 물음에 아직 한 곳에서 끝나는 답은 없었고, 그 빈칸을 누가 먼저 채우느냐가 에이전트 결제가 쇼핑까지 내려오는 속도를 정할 것 같습니다.
Bloom과 함께하기
Bloom은 사람과 기술이 만나는 오프라인 자리를 만듭니다. 다음 행사에서 뵙겠습니다.
- 💬 디스코드 커뮤니티, 행사 공지가 가장 먼저 올라옵니다
- ▶️ 유튜브, 지난 행사 강연 다시 보기
- 📸 인스타그램, 행사 사진
- 🎟️ 다가오는 행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