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는 한 번 가 보면 안다
Bloom 행사를 하다 보면 유난히 기억에 남는 분들이 있다. 그런 분들은 내가 따로 커피챗을 요청한다. 그렇게 평일 저녁 삼성동 스타벅스에서 마주 앉게 된 사람이, 토스와 뱅크샐러드에서 시니어 개발자로 일하다 나와 창업한 고의성(Abel Ko) 님과 중학교 때부터 그의 친구로 미술 거래 사업을 하다 합류한 김민성(Mark Kim) 님이다. 둘은 Ironact라는 회사를 함께 차려 AI 기반 마케팅 도구를 만들어 대기업 고객에게 붙여 주고 있고, 요즘은 샌프란시스코를 오가며 일한다. 처음 만난 건 9월 Bloom x Nebius 해커톤 자리였는데, 그날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하던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아 커피를 청했다.
그날 나는 자리를 돌며 참가자들을 인터뷰하고 있었는데, 그가 ‘AI 에이전트 600개를 띄우면 토스를 만들 수 있다’는 글로 화제가 된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어디서 본 것 같아, 집에 돌아와 그 글과 유튜브까지 찾아봤다. 토스는 PO와 디자이너, 개발자, 데이터 분석가가 한 팀을 이루는 사일로 100개로 돌아가는데, 그는 그 역할 하나하나를 AI 에이전트로 바꿔 자기 Slack 안에서 사일로를 돌리고 있었다.
PO는 FRIDAY, 디자이너는 Black Widow, 프런트엔드는 Spider-Man, 백엔드는 Hulk, QA는 Hawkeye라는 이름을 단 에이전트들이 Slack에서 서로 대화하고 서로의 작업을 리뷰하며, 막히는 일이 생기면 그를 거치지 않고 서로에게 넘긴다. 그가 자는 동안 화면 설계와 DB 설계, 배포까지 끝나 있으니 그는 아침에 Slack을 확인하고 코드 병합을 승인한 뒤 전략에 집중한다. 신경망이 뇌를, LLM이 언어를 흉내 냈듯 AI가 크게 발전한 건 늘 사람의 방식을 흉내 냈을 때였고, 이제는 조직이 협업하는 방식을 흉내 낼 차례라는 게 그 글의 요지였다.
샌프란시스코, 한 번도 안 가 보면 막연하다
의성 님은 다니던 회사 안에 AI 팀이 꾸려지던 흐름을 처음부터 맞았다. 그동안 코드를 짜며 지켜본 기술의 발전과 달리 기울기가 갑자기 가팔라지는 걸 보고,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었다고 한다.
해외로 나간 그가 처음 향한 곳은 샌프란시스코가 아니라 뉴욕이었다. 거기서 세상은 아직 AI와 한참 멀다는 걸 보고 이커머스 사업을 직접 알아보고 해 보기도 했지만, 이러다 자기가 AI에서 너무 멀어지겠다 싶어 처음으로 샌프란시스코에 갔고, 작년 12월 그곳에서 친구에게 일단 날아와 보라고 연락했다. 친구는 그 통화에서 바로 다음 날 샌프란시스코로 가겠다고 했으니, 둘 다 실행이 빠르다는 본인들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김민성 님은 개발 인력에게 눈치를 보며 부탁하던 수정 작업이 AI로 딸깍 한 번에 되는 걸 보고 너무 화가 나서, 그 길로 밀어붙이기로 하고 하루 14시간씩 매달렸다고 한다. 옆에서 지켜본 의성 님의 말로는 그 흐름을 자기가 본 사람 중 가장 빨리 알아챘고, 지금은 혼자서 다 만든다.
5년 동안 미술품을 유통하던 그는 갤러리와 작년에 문을 연 아트센터, 미술 데이터 플랫폼, IP 에이전시까지 하던 사업을 모두 멈추고 AI에 모든 걸 걸었는데, 지금이 기술과 시장을 가장 빨리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는 때이자 더 큰 시장으로 나갈 수 있는 때라는 판단이었다. 그 뒤로 10개월쯤 주 7일, 하루 12시간에서 14시간씩 3,500시간 넘게 쏟았다고 나중에 자기 글에 적었다. 작년까지는 미술품 경매 기록을 분석하며 하루를 시작했다면, 올해는 GitHub Trending과 Hacker News, TrustMRR을 뜯어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올해 초 둘이 미국 델라웨어에 법인을 함께 세운 뒤로 그가 맡는 일은 계속 넓어졌다. 처음 두 달은 영업과 마케팅을 이끌며 데이터와 인사이트를 전달하는 구조와 화면 전반을 설계했고, 직접 만든 건 랜딩 페이지와 온보딩, 대시보드 같은 프런트엔드 정도였다. 석 달째부터는 인플루언서 시딩 자동화 서비스를 운영하며 시장 데이터 수집과 실험 기록, 광고 분석, 브랜드별 에이전트를 한 콘솔에 묶은 사내 운영 플랫폼을 짓고, 해외 대형 유통 체인 총판 거래의 운영 시스템을 설계하고 개발했다. 여섯 달째부터는 국내 대기업 그룹의 여러 브랜드를 분석하는 GEO 플랫폼과 그 결과를 부서별 실행 과제로 넘겨 주는 에이전트, 사람이 대화하며 판단에 끼어드는 콘텐츠 생성 엔진을 바닥부터 납품까지 함께 만들었다.
코드베이스의 구조를 뜯어 이해하고 직접 만든 서비스를 큰 기업들에 안정적으로 내보내기까지, 생각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특히 민성 님의 경우 개발자로 일해 본 적이 없어서, 새로 배우려고 먼저 버려야 할 것도 적었고 그래서 자신의 관점이 조금은 다를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한 번 가 보면 바로 알지만, 한 번도 안 가 보면 막연할 뿐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어떻게 사람을 만났느냐는 내 질문에 의성 님은 이렇게 답하며, Claude Code를 한 번도 안 써 본 사람이 AI를 막연하게 느끼는 것과 똑같다고 덧붙였다.
그는 AI 행사에 사람이 몰리는 것도 걱정과 두려움 때문인데, 다들 딱 거기서 멈춰 있다고 했다. 한 번 만져 보면 ‘어, 나도 할 수 있겠는데’ 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그 앞에 놓인 심리적인 벽이 너무 높다.
나도 Bloom을 처음 해 보면서 이게 생각보다 별거 아니고 그냥 실행하면 되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Bloom 같은 걸 해 보고 싶다는 사람에게는 유튜브든 무엇이든 일단 해 보라고 권하는데,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막상 움직였을 때 할 수 있는 게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건드려 봐야 생태계가 보인다
두 사람은 지금의 일에 닿기까지 마케팅 도구를 몇 가지 만들어 보고, 인플루언서 시딩을 자동화해 보고, 소비재 쪽에서는 광고 영상을 대량으로 찍어 클릭률을 보는 AI 네이티브 브랜드를 직접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런 건 건드려 보기 전까지는 생태계를 잘 모르겠다는 내 말에 그는 그러면서 배우는 거라고 받았고, 나도 결국 해 봐야 안다고 맞장구를 쳤다.
K뷰티 쪽 일을 하는 줄 알고 물었더니 이미 접었다고 했다. 해 보니 자기들이 임팩트를 낼 지점이 너무 작았는데, 그 업계에서는 AI를 잘하는 게 큰 경쟁력이 아니었고 제품은 OEM·ODM 회사가 다 만들어 주니 결국 브랜딩과 퍼포먼스 마케팅에 누가 돈을 더 태우느냐의 싸움이었다.
지금 두 사람이 하는 일은 AI 검색에서 브랜드가 잘 언급되도록 돕는 일, 흔히 GEO라고 부르는 마케팅이다. 사람들이 검색창 대신 챗봇에 묻기 시작하면서 원래 거대했던 검색 마케팅 시장의 돈도 그쪽으로 옮겨 가는데, 막상 해 보니 문제는 효과를 숫자로 증명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특정 질문에서 브랜드 언급 점유율이 올라간 걸 보여 줘도 그 질문이 얼마나 자주 입력되는지 모르면 그 개선이 어떤 성과로 이어졌는지 말하기 어렵고, 챗봇 안의 사정은 밖에서 보이지 않으니 얼마를 넣으면 얼마가 나온다고 약속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이 마케팅은 숫자가 아니라 불안으로 팔린다.
퍼포먼스 마케팅을 이미 잘하고 여유가 있는 큰 회사는 다음 세대를 위한 전략 투자로 먼저 사고, 광고비 대비 매출을 엄격하게 따지는 브랜드는 아직 지켜본다. 두 사람도 첫 고객사는 아무 연결 없이 직접 연락해 뚫었고, 그 고객사 담당자가 다음 대기업 고객을 소개해 주면서 지금의 큰 고객까지 닿았다.
이 분야의 해자는 기술보다 측정 데이터라서, 먼저 자본을 많이 받은 회사가 실험용 표본을 돈으로 대량 확보해 추정치를 만든다. 여기서 추정은 AI 모델이 아니라 일부 표본으로 전체 발화량을 계산하는 통계적 추정이다. 올해 2월 GEO 분야에서 처음 유니콘이 된 Profound는 외부 소비자 패널에서 대량의 실제 AI 대화 데이터를 라이선스해 이 추정의 정확도를 높였는데, 먼저 시작하고 먼저 투자를 받아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걸 다 한 셈이라는 게 두 사람의 해석이다. 자본으로 확보한 데이터가 제품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일은 자주 있고, 점점 어려워지긴 해도 아주 가끔은 그게 해자가 된다.
그들은 AI 검색 마케팅을 비타민에, 인플루언서 시딩을 진통제에 비유했는데, 있으면 좋은 것과 아파서 값을 따지지 않고 당장 찾는 것의 차이다. 그날 오전 한 소비재 회사에서 들은 이야기도 마침 그 진통제 쪽이어서, 그 회사에서 가장 큰 팀인 인플루언서 마케팅 팀의 가장 큰 고통은 인플루언서를 찾고 협상하며 사람을 상대하는 데서 오는 감정 소모라고 했다. 시딩을 자동화하는 AI 도구가 거기까지 해 주느냐고 묻자, 직접 만들어 본 두 사람은 인플루언서 수백 명과 DM을 동시에 주고받는 것까지는 된다고 답했다.
그런데 브랜드마다 원하는 사람의 결이 달라 기준이 정형화되지 않고 예외가 너무 많으며, 사람을 갈아 넣는 에이전시와 비용으로 경쟁하는 구조라 조금 더 효율적이어도 마진이 애매하다. 무엇보다 브랜드 대표들이 사람이 판단해 고른 인플루언서를 더 믿는다.
자동화가 가장 어려운 건 결국 사람의 취향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수많은 예외에 대응하는 비용을 따져 본 끝에, 남의 회사에 들어가 이미 굳어진 일을 100에서 80으로 줄여 주는 것보다 그 기술로 여러 브랜드를 직접 만들어 0에서 1을 쌓는 편이 훨씬 빠르다고 생각을 바꿨다. 회사 안에서는 사람을 바로 줄일 수도 없고 데이터 하나 받는 데도 요청이 오가다 보면 석 달, 여섯 달이 금방 지나니, 무엇이든 남보다 빨리 짓고 ‘오리발 끼고 달리는’ 쪽이 중요하다. 이 판단도 처음부터 있던 게 아니라 해 보면서 생긴 것이라, 가설은 지금도 계속 바뀐다고 했다.
세상은 아직 AI에서 멀다
두 사람도 한동안은 사무실에 박혀 산에서 수련하듯 일만 했는데, 밖에 나와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니 세상이 생각보다 훨씬 멀리 있었다고 한다. 조금만 그 바깥으로 나가도 AI를 안 쓰는 사람의 비율이 확 커지고, 일반인은 물론 현업이 바쁜 개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의성 님이 뉴욕에서 본 것도 같은 풍경이었다. 두 사람은 광고비를 크게 쓰는 마케팅 팀조차 이미지 모델을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른다며, 그 간극을 소비자 접점에서 메워 주는 쪽이 빠르게 클 수 있고 Canva가 그렇게 컸다고 봤다.
샌프란시스코 네트워킹 = 해커하우스
샌프란시스코의 네트워킹은 해커하우스 단위로 돌아간다. 해커하우스들끼리 생태계가 잘 짜여 있어서, 낮에는 한 해커하우스에 모여 같이 작업하고 저녁에는 Frontier Tower 같은 곳에서 열리는 Luma 행사에 간다. 거기서 마시며 이야기하다가 우리 해커하우스에서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으면 그대로 자리를 옮기니, 한 시간짜리 네트워킹이 그렇게 여덟 시간이 된다. 두 사람은 Luma에 올라오는 AI 행사에 나가고 해커하우스에서 하루 종일 같이 작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임팩트를 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행사가 너무 많다 보니 주최 측은 사람을 모으려고 저녁을 다 준다. 피자를 먹으며 한두 명과 이야기하다 나와도 되는 자리인데 음식도 꽤 괜찮고, 투자자도 그런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만나며 해커하우스에는 YC 창업자들도 많다. 이달 초 SF Tech Week 기간에는 행사가 1,700개를 넘었다고 하는데, 항공모함에서 칵테일 파티를 열고 미술관을 빌려 행사를 한다는 이야기까지 들으면 커뮤니티 행사라는 말의 무게부터 다르다.
그렇게 사귄 친구가 또 친구를 소개해 주고, 생일파티에 초대받으면 비로소 들어간 거라고 한다. 거기서부터는 비즈니스로 만난 사이가 아니라 친구로 만난 사이가 되기 때문이다.
글로 전달되지 않는 정보가 두 사람이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이었다. 러닝 크루처럼 Luma에 올라온 아침 모임에 나가 같이 뛰다 보면 OpenAI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 자기는 Voice AI 연구자라며 말을 걸어오고, 그렇게 한 달 뒤에 크게 뜰 회사들을 미리 알게 된다.
X에 올라오는 텍스트로는 전달되지 않고 피부로만 느껴지는 온도가 그곳에 있다.
민성 님은 대학 시절 수업을 자주 빠졌지만, 기말고사 직전 정리 수업 주간만큼은 교수님들이 시험에 낸 단원을 훑을 때 무의식적으로 강조하는 억양과 말의 길이, 표정까지 엄청난 집중력으로 모았다고 나중에 덧붙였다. 2학년까지는 그 덕을 많이 봤고, 3학년 때는 어쩌다 그 노트를 동기들에게 팔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오래 몸담은 업계에서도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사이에 이런 신호가 넘쳐나서, 그 재미에 이끌려 시장에 들어오는 사람도 적지 않다.
내가 Bloom을 하는 이유도 결국 이것이라, 오프라인에서 나온 이야기가 정제되고 또 정제돼 X와 LinkedIn에 올라가기까지의 시간 차가 요즘 많이 줄었다 해도 먼저 아는 것 자체가 큰 차이를 만든다. 테크 한복판인 샌프란시스코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두 사람도 진짜 대화는 100명이 아니라 20명, 30명일 때 된다고 봤다. 민성 님은 몇 년 동안 작은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그걸 몸으로 느꼈고, 최근 마케팅과 AX를 주제로 작은 살롱을 열면서 다시 확인했다고 한다. 예전에 20명쯤 모였을 때는 모두가 이야기할 수 있었고 문화 공간에 오면 사람들이 확실히 풀어진다고 했는데, 내가 Bloom 행사마다 끝에 소모임을 꾸리는 것도 그래서다.
가까이서 보면 고만고만하다
민성 님은 이날 대화를 정리하며, 오프라인이 필요한 이유를 ‘내가 AI를 충분히 잘 쓰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찾았다. 피드는 나에게 맞춰져 있고 올라오는 정보도 대부분 올리고 싶은 부분만 고른 것이라, 이 질문은 온라인 알고리즘 속 탐색만으로는 답하기 어렵다. AI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구조로 제품을 만들고 데이터를 어떤 층으로 나눠 관리하는지는,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작업 화면을 볼 때 훨씬 날것 그대로 보인다. 그가 새 시장에 도전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역량으로 꼽는 것도, 계속 바뀌는 시장과 기술, 그리고 그 전체 구조를 깊은 층에서 함께 이해하고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두 사람이 얻은 또 하나도 그렇게 들여다본 화면에서 나온 자신감이었다. YC 창업자들이 어떤 레이어에서 어떤 작업을 하는지 화면을 같이 들여다보고, 그 자리에서 다 파악하지 못하면 나중에 뜯어보는데, 생각보다 별거 아니고 다들 고만고만하다. 그런데 그렇게 화면을 같이 본 팀이 2주 뒤 LinkedIn에 700만 달러를 투자받았다는 소식을 올리니, 더 큰 시장으로 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차이는 사람이 아니라 시장과 자본이다.
이미 성공해 돈이 많은 사람들이 누가 터질지 모르니 계속 투자하고, 그중에서 또 터지면 다시 투자하는 선순환이 돈다. VC도 좋은 기회를 놓칠까 불안하니 샌프란시스코를 떠나지 못하고, 모두가 미친 듯이 갈아 넣는 것도 아니어서 생각보다 여유 있게 일하는 팀도 유니콘이 되는데 갈아 넣는 소수의 팀은 그보다 훨씬 큰 회사를 만든다고 했다.
한 분이 꺼낸 밧줄에 묶인 코끼리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었는데, 자기가 코끼리인 줄 모르면 밧줄 하나에 묶여 지내지만, 큰 시장에 있으면 원숭이도 자기를 코끼리로 여기니 적어도 고릴라까지는 간다는 것이다. 어디에 있느냐가 스스로를 얼마나 크게 보느냐를 정한다.
자본은 샌프란시스코와 뉴욕 다음이 런던이고 빅테크와 AI 연구소들의 두 번째 거점도 대부분 런던에 있어서, 미국 비자가 없으면 일단 런던에 가 있으라는 말이 돌 만큼 런던에도 사람이 몰리고 Luma에 올라오는 행사 수도 같은 순서다. 패션을 하면 파리에, 뮤지컬 배우라면 브로드웨이에 가야 하듯 AI를 한다면 샌프란시스코다. 나도 샌프란시스코에 가고 싶은 이유가 거기 있는데, 테크의 성지에서 통하면 글로벌은 따라오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를 먼저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Bloom, 샌프란으로 당장 떠나세요!」와 「샌프란 = 일론 머스크 척하는 3만 명 중 찐 가려내기」에도 적어 두었다.
해자는 멈춘 사람의 것
해자는 더 이상 발전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 집착하는 것이다.
의성 님은 계속 달리고 있다면 경쟁자가 얼마나 따라오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며, 기술을 쥐고 있기보다 풀어서 시장을 키우는 쪽을 좋아한다고 했다. 특허를 풀어 전기차 시장을 키운 Tesla처럼 특허라는 방패가 없으면 스스로 계속 일할 수밖에 없고, 그런 문화여야 가장 빨리 나아간다는 것이다.
세상을 제로섬으로 보지 않으니 빵 하나를 나눠 먹을 게 아니라 두 개, 세 개를 만들면 되고, 에이전트가 200번 넘게 주고받는 일을 스스로 해내는 문제처럼 아직 아무도 풀지 못한 어려운 문제도 많으니 자기는 그런 걸 풀겠다고 했다.
돈에 대한 생각도 같은 결이어서, 실리콘밸리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들도 요트와 NBA 구단, 시계까지 다 사 보고는 결국 제품 만드는 게 좋다며 돌아온다고 했다. 그렇게 보면 지금 이걸 하는 자기와 100조 부자가 돼서 이걸 하는 자기는 겉으로 보기에 다를 게 없으니, 그는 임팩트 있는 일, 인류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민성 님은 해자가 환상에 가깝다며, 측정 데이터에 돈을 쏟는 것도 따라오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더 좋은 제품을 만들려니 필요해서 하는 일이고 광고비 입찰가를 끌어올려 후발 주자가 아예 못 들어오게 하는 사다리 걷어차기와는 다르다고 했다. 다만 시장에 한계가 보이면 걷어차는 쪽으로 가는 사람도 있으니, Warren Buffett 같은 투자자와 George Soros 같은 투자자가 있듯 결국 성향의 차이라는 것이다.
먼저 가서 뚫어 놓겠다
두 사람 중 한 분은 지구 어디든 하루면 가니 비행기를 지하철 타듯 탄다고 했다. 외주로 몇 건 따서 짭짤하게 버는 에이전시가 될 수도 있지만 그러면 다음이 없고 깃발을 꽂지 못하니, 그 길로는 가지 않는다는 말도 두 사람에게서 나왔다.
의성 님은 거북선이 그려진 지폐 한 장을 들고 영국 은행을 찾아가 조선소 지을 돈을 빌렸다는 정주영 회장의 일화를 꺼내며, 그런 발상은 그전에 데이터가 없던 일이라 AI가 절대 가르쳐 줄 수 없다고 했다. 정주영 회장도 이병철 회장도 전쟁으로 사업이 망하고도 다시 일어나 회사를 만들었으니, 그보다 어려운 상황이 자기에게 닥칠 것 같지는 않고 그러니 나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싱가포르에서 Bloom 행사를 열었을 때 알게 된 유럽 친구는 자기 나라와 싱가포르에서는 네트워크가 한정적이라 AI 일을 벌이기 어려웠는데, 무조건 샌프란시스코에 가겠다더니 가서 뚫고 또 뚫다가 표도 없이 Elon Musk의 행사까지 보고 왔다. 그 친구를 보면 역시 가서 비벼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한국에서 인스타그램을 보며 멋있다고 하는 것보다 가서 직접 찍어 올리는 게 훨씬 낫고 그렇게 계속 네트워크를 만들고 사람을 인터뷰하며 올라가는 것이다.
의성 님은 미국에 먼저 진출해 잘하고 있는 한국인도 있지만 만나 보면 조금만 더 찌르면 넘어와서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아직 뛰어들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며, 자기가 먼저 가서 뚫어 놓겠다고 했다. 나중에 고민하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와 보라며 방을 내주는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정작 K팝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사람을 모으려면 K팝 파티부터 해야겠다는 그에게, 나는 떡볶이만 해 줘도 다 온다고 거들었다.
레딧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두 사람은 몸을 옮기지 않고 나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레딧을 권했다. 테크 제품이라면 이것저것 써 보는 사용자가 모여 있는 해외 커뮤니티에 올려야 하고, 레딧에 올라온 글은 AI 답변에도 잘 인용된다. 민성 님과 대학 때부터 가까운 지인이 사이드 프로젝트로 만든 API 크롤러 서비스는 레딧을 중심으로 GEO와 SEO를 잘 준비해 둔 덕에 북미에서 자연 유입이 터지면서, 6개월 만에 매달 3만 달러의 반복 매출을 내게 됐다.
두 사람 중 한 분은 자기 채널이 곧 돈이라고 했다.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게 되면서 기술보다 믿고 따르는 사람이 중요해졌고, 중국 커머스에서 왕훙이 그랬듯 고를 게 너무 많으면 사람들은 믿고 싶은 사람의 것을 산다. 채널이 있으면 이상한 걸 내놓아도 일단 몇만 명이 보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Bloom을 하면서 가장 좋은 건 수면 위로는 안 보이던 언더독들이 자꾸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찾아 알아 가는 게 재미있고 배우는 것도 많아서 나는 틈만 나면 커피챗을 청하는데, 이번 만남도 Bloom 해커톤에서 의성 님이 눈에 띈 덕분이었다.
그날 마이크를 잡았던 그도 이야기를 마치자 사람들이 찾아와 이것저것 물었고, 자기에게도 나눌 인사이트가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그는 결국 사람을 만나게 해 주는 일이 가장 크고 샌프란시스코가 그걸 잘한다며, Bloom이 AI 쪽에서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Bloom을 두고는 해외 테크 회사들이 아시아에서 큰 AI 커뮤니티를 찾으면 AI가 Bloom을 추천해 줄 거라는 말과, 대기업 스폰서를 받아 크게 열리던 개발자 컨퍼런스를 다음 세대에서는 Bloom이 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이 나왔다. 비개발자가 마음 편하게 와서 개발자에게 배울 수 있는 자리라 좋다는 말에는, 개발자들은 대부분 알려 주는 걸 좋아하고 오픈소스 문화가 몸에 배어 있다는 설명이 붙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한 번 모이면 여덟 시간이 되지만, 서울에서는 아직 행사가 끝나면 곧장 흩어진다. 민성 님은 서울 Luma 목록에도 기업이 아니라 커뮤니티가 주도하는 행사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고 했고, 나도 그 한 시간을 조금씩 늘려 가는 판을 서울에서 만들고 싶다.
Bloom과 함께하기
Bloom은 사람과 기술이 만나는 오프라인 자리를 만듭니다. 다음 행사에서 뵙겠습니다.